해원의 아침묵상 / 2017. 8. 2 (수)
■ 민수기 23:27-24:9
[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
주술사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26).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이처럼 두 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발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발람을 또 다시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로 데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며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고 말합니다(27-28). 약속을 주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락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정성스럽게 제물을 마련하여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에 하나님께서 혹 마음을 바꾸실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을 정성스럽고 풍성한 제물로 가리려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물질적인 가치관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젖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물론, 고대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성에 의해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발락과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묻기보다는 나의 정성과 노력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주권적으로 선택된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탁의 장소를 바꾸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발락이 두 번째 제사에서는 이스라엘 진영의 끝만 보이는 비스가 꼭대기로 데려갔지만(14), 세 번째에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모든 진영이 자세히 보이는 브올산으로 발람을 데려 온 것은, 그곳이 바알의 또 다른 근거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의 영역에 더욱더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우상과 같은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바란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같이 대하는 것으로 우상숭배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락이 이루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즉, 자신의 부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불법적이고 악의적인 것이었습니다(27). 그의 제사가 지극한 정성을 다해 최선을 드린 것이었지만, 그러한 행위가 신앙적인 행위라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않고 그의 얼굴을 광야로 향하여 이스라엘의 진영을 바라봅니다(24:1).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발람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을 선하게 여기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발락의 요구에 따라 두번 째 제사를 드리고도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고, 이러한 발람의 행위에 분노하는 모압 왕 발락에게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23:26). 즉, "나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발람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발락이 요구하는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가 제시하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싶은 탐심이 있으나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마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외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발락에게 전하는 일에 충실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불순종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하나님께서 선하다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이 자신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을 여호와께서 선하게 여기심을 보았다고 한 것은, 자기의 마음과 의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따라 강권적으로 선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발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이 원한다 해도 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얼굴을 돌려 광야로 향하여 이스라엘 모든 진영의 모습을 바라 보며 축복한 것은 믿음의 순종이나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체념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람에게 있어서 점술은 자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한 것도(22:6), 그의 점술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점술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아무리 자신이 점술을 사용한다 하여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끝내 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진영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발람 위에 임하셨습니다(2).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술만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셨지만, 이제 발람의 모든 마음과 인격을 사로잡으시고 주권적으로 사용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발락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발람이 하나님의 영에 충만케 될만한 영적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에게 강권적으로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이스라엘을 향한 세 번째 축복은 발람의 시선으로 이스라엘을 본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락에게 먼저 주술사 발람이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발람은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이제 말씀을 듣는 자로,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로, 엎드려 눈을 뜬 자로 예언하고 있음을 밝힙니다(3). 즉, 사람의 아들이 아닌, 눈은 있으되 보지 못했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붙들린 자가 되어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한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영에 압도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발람의 전인격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과 그들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을 말씀하시는 한편, 주변나라와 민족들이 장래에 겪게 될 일까지 말씀해 주십니다(5-8).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의 세력이 왕성해 질 것이며, 강 가의 동산과 같이, 물 가의 백향목과 같이, 물통에서 물이 넘치는 것과 같이, 그 씨가 많은 물 가에 있는 것과 같이 번성하게 되리라 말씀하시며,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이스라엘은 들소와 같은 힘으로 주변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정복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이 결국, 대적들의 훼방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신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훼방하고 멸망시키려고 하였던 나라와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판단받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9). 이스라엘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이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이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기도>
물질적인 가치관에 젖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형상의 우상과 같이 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옵소서. 내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