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0. 13 (금)
■ 예레미야 13:20-27
[ 익숙한 죄악이 일상이 되다 ]
유다는 한 때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그 소식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유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사자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을 비롯하여, 군기고와 창고에 있는 모든 것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여주고 맙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서 부터 온 자들인가를 묻자 히스기야 왕은 다만 먼 지방 바벨론에 왔다고 대답합니다(왕하20:2-15). 즉, 유다와 아주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서 왔기 때문에 무기고를 보여주어도 그들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대적인 앗수르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히스기야의 독단적인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왕상20:17-18).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20). 대적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하였던 바벨론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떼인 백성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가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황폐해져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더 큰 권력과 힘을 방패삼아 대적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유다의 친구를 대적으로, 안녕과 평화를 위해 그들 스스로 우두머리로 삼았던 자를 핍박과 압제자로 바꾸십니다(21). 유다는 동맹이라고 생각했던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친구라 생각했던 그들에게 노예가 되며,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두머리로 삼았던 자들에 의해 사로잡혀 가 산고를 겪는 여인과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것을 의지한 자는 세상의 것으로 인해 망하게 됩니다. 친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진정한 친구요 동맹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곳곳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라는 신음과 탄식이 들립니다(22). 자기에게 만족스러우면 의가 되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불의라고 생각하였던 자들이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법적이고 불의한 것으로 단정하지만, 정작 크고 깊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결과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침략을 자신들의 죄악을 묻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지 못하고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보다는 육체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필요에 따라 애굽아니 앗수르 뿐만아니라 먼 나라인 바벨론과도 동맹을 맺으며 나름대로 실리외교를 펼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바벨론의 침략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 바벨론의 배신과 탐욕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유다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있었고, 그 성전에서 절기에 따라 성회로 모였으며, 제사와 예물을 어김없이 드려왔습니다. 그러기에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을까?"라는 그들의 탄식은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위를 부족함없이 하였으나 그 마음으로는 죄악을 행하였던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은밀한 죄악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이나 종교적인 행위만을 생각하며 바벨론의 침략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유다가 얼마나 자기 죄악에 깊이 도취되어 있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멸망되었으며,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고통 받은 까닭에 대해서 그들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 주변의 모든 민족들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민족들이 고통받는 유다의 모습을 보며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하셨다 할지라"고 조롱하였습니다(22:9). 유다민족이 아닌 다른 여러 민족들 조차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지만, 정작 심판을 받는 당사자인 유다는 왜 그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모르면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내게 닥친 고통 앞에서 지혜와 명철을 하나님께 구하고, 진정으로 은밀히 감추어진 나의 모든 죄를 낱낱히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함을 입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유다에 대해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22). 여인의 치마가 들리는 것은 정복자들에 의한 무차별적인 성폭력을 의미하며, 발뒤꿈치는 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데, 이 발뒤꿈치가 상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랑하고 힘과 권력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들이 당한 재앙은 물론이고,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죄악조차 깨닫지 뭇한 유다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죄악은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습니다. 즉, 죄악이 그들 삶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상숭배와 음행이 문화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피부가 검은 구스인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같이, 표범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같이, 삶 전반에 퍼진 유다의 죄악된 행위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23). 그러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습관화된 죄악이 그들을 붙잡고 있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신들의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을지라도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아오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을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환란을 당해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는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혹한 연단의 과정을 준비하십니다.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실 것이며, 이방여인들과 행음하였던 것을 기억하시고, 이제 그들의 여인들의 치마가 얼굴까지 들춰져 수치를 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24-26). 하나님께서 그들이 간음하며 산 위에서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27). 이 모든 고통의 결과는 유다가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거짓된 것들을 신뢰한 까닭이었습니다(25). 유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약속과 주신 기업이 그들의 분깃이 아니라 심판의 고통만이 합당한 몫이요 분깃이 되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쾌락은 잠깐이요 고통은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의 기도>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타협하며 즐겼던 모든 쾌락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익숙한 죄악이 이미 내 삶의 방식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