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
태식은 착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서류를 정리하여 책상 서랍에 넣은 뒤 열쇠를 채우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태식의 다리에 밀린 철제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바닥에 접혀지며 넘어졌다. 태식은 의자를 일으켜 세우고 출입구 왼쪽에 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태식이 활동하고 있는 사회봉사단체인 ‘들풀회’는 아직 국가에서 공식적인 봉사단체로 인준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뜻있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 지역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소박한 봉사 단체였다. 자금난등 여러 가지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3년째 접어든 시점에 봉사회원만 200명이라는 성과를 거두며 근육병환자 돌보기나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무실이라고 해야 3층짜리 허술한 건물의 20평 남짓 되는 2층을 월세로 임대해 놓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회원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봉사활동을 나갈 때면 적어도 회원의 3분의 2가 동참하는 내실 있는 봉사 단체였다.
태식은 사무실문을 닫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등이 깨어져 불이 들어오지 않은지 오래된 계단은 캄캄했다. 문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어머!”
“문희씨?”
순간, 태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자신과 부딪힐 뻔했던 사람은 바로 문희였던 것이다.
“여긴 웬일로?”
“예, 저… 지갑을 빠뜨리고 온 것 같아요.”
문희는 지갑을 잃어버린 듯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20여분을 기다려 버스를 타려던 순간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고 황급히 사무실로 다시 뛰어 오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주변에 몇 안 되는 상가들의 희미한 불빛만으로도 문희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태식은 계단을 올라가며 문희에게 따라오라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문희는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떨어져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뛰어왔던 그녀의 거친 호흡이 여과 없이 태식의 가슴에 전달되고 있었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장석에서 요란한 소리가 세어 나왔다. 태식은 왠지 자신의 방이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사무실로 들어오는 문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기억나세요?”
형광등 스위치를 켜고 태식은 신입회원 소개가 있었던 회의실로 들어서며 문희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고는 회의실에서 자신이 앉았던 자리 아래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평 안 되는 회의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지갑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쩌죠?”
태식은 마치 자신이 문희의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처럼 미안했다.
“할 수 없죠….”
“돈이 많이 들어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문희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머리를 숙이고 사무실 문 쪽으로 돌아섰다.
“저, 잠깐만요!”
태식이 부르는 소리에 문희는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댁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아뇨….”
그녀는 태식의 부탁하는 어조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태식은 잠깐 망설였다. 그래도 붙들어서 태워다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 박동 질을 해 대었지만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문희의 뒤를 쫓아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태식은 불을 끄고 계단을 내려가다 문득 소변을 보고 싶었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소변이 급해 옴을 느꼈다. 태식은 1층과 2층 계단 중간에 자리잡은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세면기 옆쪽의 밤색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좁은 화장실에는 남자 소변기가 따로 없었고 세면기와 안 쪽문으로 수세식변기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소변을 보며 무심히 정면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창문을 응시했다. 그런데 창문틀에 문희의 것으로 보이는 빨강색 지갑이 놓여 있었다. 태식은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잡았고 하마터면 소변을 바지에 적실 뻔 했다. 화장실을 빠져나온 태식은 자신의 프라이드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사무실 옆 골목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희의 지갑을 열어 보았다. 문희의 지갑은 돈을 넣어두는 곳과 메모를 하는 곳으로 구분된 수첩형태였다.
왠지 허락 없이 열어 본다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그녀를 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태식은 용기를 내었다. 먼저 수첩부분 앞쪽에 돈이 담겨 있을 것 같은 주머니의 지퍼를 내렸다. 그곳에는 토큰 몇 개와 3천원이 들어 있었다. 순간 태식은 그녀가 어쩌면 집까지 걸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를 다시 닫고 수첩부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훑어보았다. 그곳에는 분홍색 볼펜으로 깨알같이 쓰여 진 문희의 글씨들이 빠끔히 쳐다보고 있는 듯 했다.
‘2월 2일, 야근을 하고 돌아간 집은 등 붙일 곳이 없을 만큼 어수선하게 변해 있었다. 엄마는 아침에 괜찮다고 하시더니 몸살기운이 심해졌는지 옷장 앞에 누워 꼼짝도 안하고 계셨고 오빠는 혼자 밥을 먹으며 온통 흘려놓고 바지에 똥까지 싸놓고 있었다. 평소에 잘 가리더니만 오늘은 웬일인지 급했나보다.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는 건 바지를 벗기고 오빠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들어갈 때 오빠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다. 오빠…, 오빠…, 그러지마 그러면 내가 더 힘들어….’
조그만 페이지에 깨알처럼 빼곡하게 쓰인 메모 하나만으로도 문희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태식은 가슴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지갑을 운전석 문 사물함에 넣어두고 태식은 자동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중고를 구입해 벌써 5년째 타고 있는 자동차는 시동을 걸자 엔진에서 유난히 덜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