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 / 안해원 중편소설

autom20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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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

묘지 앞에 선 태식의 검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인적이 없는 공동묘지에 불어오는 흙바람은 그의 한쪽 손에 꼭 쥐여진 수선화의 꽃잎을 함께 흔들어댔다.
대북산 기슭, 오래전부터 찾지 않은 듯한 묘지엔 봉분이 비바람에 쓸려 낮아진 상태였고 그 앞엔 지난해 태식이 가져다 놓았던 수선화 다발이 무성히 자란 잡초들 사이에서 몇 개의 꽃대만 비닐에 쌓여진 채 뼛조각처럼 으스러져 있었다.
"나 왔어…, 나 왔다구…."
흐느끼는 태식의 어깨위로 푸른 밤나무 잎이 떨어지고 손에 든 수선화 다발을 비석처럼 묘지 앞에 세우던 태식의 다리가 휘청거리듯 풀썩 주저앉는다. 멀리 산골짜기엔 잔설이 겨울의 지나간 흔적을 발자국처럼 남기고 있는 3월, 태식은 해마다 3월이면 습관처럼 수선화 다발을 들고 대북산 기슭을 찾았다. 지난 20년간 그는 운명처럼 대북산 기슭에 있는 공동묘지로 무의식에 가깝게 발걸음을 하곤 했다. 이미 세 아이를 둔 한 가정의 가장인 그를 무엇이 몽유병처럼 이곳으로 끌어다 놓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식은 봉분의 잡초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양 손을 넓게 펼친 채 거의 쓰러진 듯 엎드려 있었다.
"문희야…, 문희야…."
그의 입에서는 간헐적으로 '문희'라는 이름만 토해내 듯 울컥거리며 나올 뿐,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일어설 줄 몰랐다.
K 시에서 30여 분을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로 들어와야 하는 대북산은 해발 400 미터도 안 되는 작은 산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때인가 부터 산기슭마다 묘지들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어느새 지난 20년간 산 전체가 마치 공동묘지처럼 흉물스럽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태식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태식은 산 동쪽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밤나무 밑의 문희의 무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지난해 문희의 무덤을 찾으며 K 시내의 어느 철물점에 들러 사온 낫으로 봉분 위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과 아카시아 나무를 깔끔하게 걷어 내었음에도 밤나무가 아니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문희의 무덤을 삼켜버린 잡초들과 아카시아 나무, 태식은 울음을 삼키고 비로소 봉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봉분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아두었던 신문지에 싸여진 낫을 들고 문희의 머리를 잘라주듯 봉분의 잡초를 잡아 흙이 패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잘라내었다. 태식은 그 일이 마치 성스러운 일인 듯 봉분에 감히 발을 올리지 못하고 봉분의 윗부분을 양팔로 짚어가며 엎드린 채 잘라내었다. 잡초를 잘라내던 그의 손이 다시 심하게 떨리며 이내 낫을 놓은 채 흐느낀다.
"문희야! 미안해, 미안해…, 나만 살아서 미안해…."
오전 11시, 아무도 없는 대북산 기슭 한 무덤에 엎드린 그의 흐느끼는 소리는 작았음에도 메아리처럼 곳곳에서 부딪혀 울리고 있었다.

20여 년전, 사회봉사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태식은 어느 날 신입회원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문희를 처음 보았다.
작은 키, 유난히 검고 윤기가 있는 단발머리와 갸름한 얼굴에 하얀 피부의 문희는 여러 명의 신입 회원 중에서 가장 먼저 태식의 눈에 띄었다.
200여 명의 사회 봉사단체의 임원이었던 태식은 새로 입회한 회원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역할을 맡아 해 오던 터였다. 태식을 비롯한 임원들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10여 명의 신입회원들은 장애인들을 내 몸과 같이 정성껏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이민석 회장의 설명에 눈을 총총히 뜨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문희만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 놓은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임원들을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신입회원들이 일어나 소개하는 순서가 돌아 왔을 무렵, 비로소 머리를 들어 올린 문희의 시선이 어느새 태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큰 눈은 젖어 있는 듯 했고 뺨은 상기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문희에게 태식은 안심하라는 듯 지그시 웃어 보였다.
"전 '서문희'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22살이며 현재 가전제품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고 있다는 인사말 끝에 애써 웃음 짓던 문희의 입술은 작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입회원들의 소개가 끝나자 이민석 회장은 신입회원 입회원서를 태식에게 건네 주었다.
"제가 대충 설명은 해 주었지만 그래도 봉사 현장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이니 세부적인 것은 김 간사님이 잘 가르쳐 주세요."
이민석 회장은 신입회원들 앞에서 마치 태식을 소개하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태식은 자신의 소개말과 함께 세부적인 신상명세가 적혀있는 입회원서를 받아 들자마자 상투적인 확인이라도 하듯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조금이라도 문희의 입회원서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 김태식이라고 합니다."
임원들이 일어서서 신입회원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할 때 태식은 맨 먼저 문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문희는 선뜻 손을 내 놓지 못하고 놀란 토끼처럼 태식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참, 민망하네요."
태식이 재촉이라도 하듯 재차 문희에게 말을 건네자 문희는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태식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문희의 손은 차가웠다. 어쩌면 그것은 태식의 손이 따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문희의 손을 꽉 잡지 못한 태식으로서는 잠깐의 접촉이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신입회원 환영회가 끝난 후 태식은 간사실 철제의자에 앉아 문희의 입회원서를 살펴보았다.
문희의 입회원서 하단부의 가족사항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다만 어머니의 이름과 다섯 살 위인 오빠의 이름만 적혀져 있을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화안동 산 중턱 마을에 주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희도 역시 어렵게 생활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회원서 뒤편, 자기 소개란을 읽던 태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10년 전 결핵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오빠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오빠를 보며 장애인의 고통을 알게 되었고 오빠로 인해 많은 시간은 뺄 순 없지만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오빠와 같은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태식은 그제야 그늘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애써 웃어 보이던 그녀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던 태식은 한동안 입회원서에 붙은 문희의 명함판 사진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