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나여." 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면 몇몇은 잠깐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자리를 피하는 건 주로 회사의 창업주, 선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으며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며 사무실로 찾아왔었다고 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 일이다. 그러니까 회사와 할아버지가 인연을 맺은 지 꽤 오래 됐단 뜻이다.
창업주, 선임들이 자리를 피하고 나면 할아버지를 상대하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다. 할아버지가 찾아오면 모두가 모니터만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그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할아버지 커피를 탈 때면 티스푼을 더 바쁘게 움직였다. 녹지 않은 커피알을 보고 뭐라고 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꼭 몇 알은 녹지 않고 둥둥 떠다녔다.
커피를 내 드린 이후가 조금 고역이었다. 할아버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말씀을 이어갔다. 주로 당신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30분씩 들으면, 다시는 할아버지를 맞이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다.
사실 할아버지를 꼭 대접해 드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사무실은 직원이 아닌 사람들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고 오래 머무를 수 있는 협업 공간도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이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도 그들 중 한 명일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맞이하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그 공간에서 혼자 커피를 타 마셨다. 그런 날엔 "할아버지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하고 말을 흐렸는데 할아버지는 "다음에 또 오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돌아가곤 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어떤 날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다. 그런 날 중 어느 날,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정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가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해가 바뀌면 한 번. "달력 있어?"
언젠가 협업 공간의 커피믹스가 왜 이렇게 금방 없어지는지 모르겠다고 담당 팀장은 며칠 툴툴댔다. 커피에 발이 달렸다고. 큰 박스를 얼마나 자주 사야 하는지 모른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CCTV 파일을 돌려 본 팀장은 멋쩍은 듯 웃었다.
녹화된 영상 속에 할아버지가 있었다. 노란 커피믹스 봉지를 한 움큼씩 몇 번을 가방에 넣었다고 했다. 그 얘길 듣고 나는 정말 웃겨 미치겠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그때 큰 소리로 웃었던 일이다.
사무실에 내가 없으면 할아버지는, 그 아가씨는 어딨냐며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 아가씨는 뭣도 모르면서 큰 소리로 웃었으며 이제 그 사무실에 언제고 그 아가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