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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잡꾼과 사악함의 예술가

ai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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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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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고찰

나치즘의 발흥 원인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는 당대 사회상의 혼란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한 자존심의 타격, 막대한 배상금 문제, 정치적 혼란, 경제 공황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 사태 등등. 그리고 이 문제점들의 궁극적인 원인, 즉 원흉(元兇)을 유대인에게서 찾고자 하는 광풍이 불었다고 보는 것이죠. 물론 이건 전형적인 마녀사냥이고, 이후 논의는 이런 화형식의 지도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걸 라캉주의 정신분석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20세기 초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름이었던 베르사유 체제와 바이마르 공화국이란 <상징계>는 독일 시민들에게 안정감이 아닌 절망감만 안겨다 줬습니다. 만연한 실업과 굶주림이란 <실재>의 모습들이 나타났고, 본디 정의상 실재란 상징계의 미끄러지는 틈새였지만, 1923년 10월 한 달 동안에만 물가가 거의 300배 상승해버린—참고로 1932년 말에는 100조 마르크화까지 발행됐을 정도로—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독일 시민들에게 단순한 <틈새>로만 취급될 수 없었죠. 어느 누구도 이런 가혹한 실재 속에 머무르고 싶지 않고, 또한 머무를 수도 없는 법입니다. 당연지사 안정감이나 소비 활동 혹은 사회적 역할 따위를 갖고 싶다는 <욕망(désir)>은 대책을 찾기 마련이고, 여기서 우선적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유대인이란 식으러 번역되죠. 이로써 기존의 상징계에 봉사해봤자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니, 그 상징계 바깥에 있던 <대상a>으로서의 유대인을 열렬히 욕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이런 의미에서 상징계와 대상a의 차이란 법복(法服)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렇지만 마녀를 아무리 태워 죽인다고 해서 흑사병이 멈추진 않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상징계 바깥, 그러니까 그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환상인 대상a를 향해 봤자,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해결될 수 없었죠. 결국 기존의 상징계와 대상a로도 실재의 간극을 메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여기서 이런 가혹하기 짝이 없고 불가해한 세상 자체를 불태워 버리려는 세계대전은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과 세계대전의 차이점이란? 전자는 이런 교착상태를 받아들임으로써 모종의 체념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 반해—이걸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라는 슬로베니아식 정언명령을 세워볼 수도 있겠지만—후자는 교착상태의 고통을 받아들일 바엔 자폭해 버리겠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대전은 단순한 계산착오라고 보기엔 묵시록적 분위기가 강했던 사건이긴 했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단연 히틀러라는 문제적 인물입니다. 우리는 히틀러가 나치당의 당수로서 정권을 잡아가는 과정을 기회주의적 군중선동가 내지 협잡꾼의 전형으로 파악해볼 수 있고, 이건 아주 손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걸로 소거되지 않는 문제는, 히틀러와 그의 친위대 조직이 강제수용소를 세우고서 전대미문의 대량 학살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데에 있습니다. 1938년 11월 9-10일 동안 유대인 상점을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방화했던 수정의 밤(Kristallnacht)으로 공황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그 이후 정세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말로 유대인들을 절멸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단순한 정치모사꾼이나 협잡꾼 따위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아우슈비츠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은 독일 내부가 아닌 외국 점령지에 비밀리에 지어졌고, 학살이란 공식적인 사건은 독일 시민들에게 결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학살의 입안 및 실행자들은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 대중의 눈앞에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반인륜적인 일이란 것을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실제로 나치는 유대인들을 그냥 총살했던 것이 아니라, 강제수용소 내에서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서야 비로소 학살을 집행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붙어있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가혹한 농담과 희생자들이 가스실로 갈 때 재소자들로 이뤄진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등의 일들은…… 정말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치적 이유에서 진심으로 유대인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봤다면, 이렇게 잔혹한 모욕을 하면서 죽일 이유가 없죠(심지어 비효율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지적은 정당하고 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육체적으로 죽이기 전에 어떤 식으로 다루었는지 살펴보면 나치의 신념이 제 나름의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나치는 신체와 정신에 모욕을 가하는 고문을 통해 유대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을 우선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했으며, 오직 그러고 난 후에만 그들을 죽였다. 나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즉 유대인은 쥐새끼나 기생충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을 쥐새끼나 기생충 같은 상태로 끌어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생각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무사유에 기초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제기하면서, 나치를 악마화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조라는 더 큰 악을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히틀러에게 악마적 측면—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악함의 예술가>—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너무도 분명히 칸트가 악마적 악(diabolical Evil)이라고 불렀던 것을 행해버렸는데, 이걸 어떻게 없는 일로 치부하겠습니까? 유대인을 절멸해야 한다는 히틀러라는 대타자의 명령 하에—이 부분이 최소한의 양심까지 대리할 수 있게 해줬죠(그저 명령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악마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충족시켰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2 참고로 지젝의 타협책은 히틀러가 원래 협잡꾼이었지만, 반유대주의를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악마적 욕망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목적전치로서의 아이러니스트인 히틀러. 「결국 앞서 말한 역설의 해결책은 히틀러가 스스로를 궁극적인 아이러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는 자기가 벌여놓은 게임에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사로잡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생각엔—비록 거북할지라도—이런 악마적 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욕망 그 자체는 도덕법칙을 무시하기에 잔혹과 외설에 구애받지 않고, 이 점을 간과하면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악마적 악의 근본은 자연과의 유비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정신분석의 맥락을 계속 따라가자면, 상징계와 대상a로부터 아무런 소득도 거둘 수 없게 된 주체는 어떻게 될까요? 마지막 남는 것은 자살 내지 신성화라고 보입니다—그렇다면 후자의 심리 상태는 어떻게 진행될까? 일단 기후나 우연 같은 자연적 현상들은 도덕법칙과 상관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적용되고, 그 막대함은 오랫동안 절대 권력을 가진 신으로 상징화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망상의 원리는 동일시잖습니까? 상징계과 대상a로 해결되지 않았다면, 결국엔 모든 문제를 소거시킬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추구하게 되고, 이걸 망상적으로라도 대리 구현하려고 들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신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자연처럼 행동해버리는 것, 즉 도덕법칙 일체를 짓밟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유대인을 절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신성의 구현을 위한 의례 행위라고 볼 수 있죠—이로써 히틀러는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향기(연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욕망을 이뤘으니 향락을 즐기게 된 셈이죠. 물론 궁극적으로는 헛짓거리입니다. 신은 없고,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죄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악의 평범성>은 보충되어야만 합니다. 인간을 악마로 취급하는 것이 악의 진면목을 가릴 위험이 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죠. 되레 인간을 악마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악의 진면목을 가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거야말로 <평범한> 것입니다. 히틀러를 이상심리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이상심리의 씨앗이 있다고 진단해보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협잡꾼과 사악함의 예술가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우슈비츠 자체를 신비한 무언가로 승격시키려는 대학 내 홀로코스트 연구의 지배적 양상은 징후적입니다. 악마화를 받아들인다면 아렌트의 함정에 빠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증적 사실을 무시하게 되지만, 동시에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심연의 일반화를 받아들인다면…… 연구자 스스로도 괴물을 품고 사는 것이기에 심히 불편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엔 아무런 신비도 없습니다. 이게 진짜 비극이죠.

이만 마칩니다. 총총.

※사족(蛇足). 여담으로 밝혀두는 거지만, 저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젝의 (결론이기도 한) 음모론은 그다지 믿지 않는 편입니다—무리수. 어제 어느 구독자 분께서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는데—비록 그분이 주문한 것은 죽음충동이었지만……—때마침 손에 잡히는 책이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인지라 이렇게 풀어보게 됐네요. 재미있는 책이니 일독을 권합니다.

※메모한 구절들

-희생의 제스처가 노리는 일차적 목표는 우리가 희생을 바치는 타자와 어떤 이득이 남는 교환을 하겠다는 계산에 있지 않다. 희생의 보다 기본적인 목표는 희생이라는 우리의 간청에 화답할 수 있는(혹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어떤 타자가 저 바깥에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비록 나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마 다음에는 이번과 다르게 응답해줄 타자가 있다는 것을 나는 희생의 제스처 속에서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이닥칠지 모를 모든 재난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저 바깥 세계는 희생의 제스처 속에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자동 기계가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되므로, 재난과 같은 끔찍한 결과조차도 맹목적인 우연의 영역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응답으로 읽혀질 수 있게 된다. 103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히틀러의 섹슈얼리티에서 어떤 ‘도착적’ 병리를 읽어내려고 애쓸 때 그들이 실제로 겁내는 것은 거기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리란—즉 사적인 친밀성의 영역에서 히틀러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는—두려움이다. 그러한 결과는 히틀러가 저지른 괴물스런 범죄를 훨씬 더 소름 끼치고 섬뜩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연구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맬 때 (하나님이 악마적이라는 이단적인 주장을 비롯한) 다른 어떤 주장도 그처럼 엄청난 윤리적 재앙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블라인드 효과(blind effect)처럼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낫다. 103-104

코미디의 소재란 결국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들이며 웃음이란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처하는 한 방식이 아니겠는가. 108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숭고한 악이라 불릴 만한 어떤 것으로, ‘정상적인’ 정치적 담론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너머에 있는 접촉 불가능한 예외로 승격시키는 이 홀로코스트의 탈정치화 또는 지극히 냉소적인 조작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 어떤 종류의 정치적 위계 관계를 정당화하려는 목표를 가진 또 하나의 정치적 개입일 수가 있다. 그것은 첫째, 탈정치화 그리고/혹은 희생자 드러내기(victimization)라는 일종의 포스트모던의 전략일 수 있다. 둘째, 서구의 국가들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하는 제3세계의 여러 폭력적 양상들을 절대적 악으로서의 홀로코스트와 비교해 사소한 것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셋째, 모든 급진적 정치 기획들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게끔 하는 일에—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에 재갈을 물리는 사유금지조치를 지원하는 일에—복무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말함으로써 말이다. “당신이 제안한 것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홀로코스트로 이끌어가게 되리란 걸 알기나 하십니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비록 이런 생각의 지지달이 품고 있는 진심까지 의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홀로코스트를 절대적 악이라는 심연으로 만듦으로써 홀로코스트를 탈정치화하는 것에 담긴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정치적 내용이란, 공격적인 시온주의자들과 서구의 반유대주의적 우파들이 오늘날의 급진 정치적 가능성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체결한 정치적 협정이라는 사실이다. 107

이와 반대로, 란츠만은 홀로코스트가 어둠 속에서 그 비밀이 가장 잘 유지되는 신비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탐구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점은, 홀로코스트에는 빛 속으로 끌어내야 할 아무런 신비도 없다는 것, 풀려야 할 어떠한 수수께끼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역사적 탐구 혹은 그 외의 다른 어떤 외적 환경들에 대한 탐구를 수행한 다음 그 위에 덧붙여야만 하는 것은 다만 행위 자체의 심연이다. 그것의 모든 괴물스러움 속에 나타나는, 자유 의지에 따른 결정의 심연 말이다. 104-105

[각주5] 이하 논의에서는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Ce qui reste d'Auschwitz)』의 2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무슬림>이라는 명칭에는 무엇보다 반(反)아랍적 인종주의의 흔적이 뚜렷하다. <무슬림>이라는 명칭은 집단 수용소 수감자들이 [유대인 동료들인] 이 <살아 있는 시체들>의 행태를,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체념한 채 모든 참화들을 신의 뜻에 기반한 것인 양 수동적으로 참아내는 자들>이라는 서구인들의 표준적인 <이슬람교도(Muslim)>이미지에 투영했던 데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유대인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무슬림>이라는] 이 명칭은 새로운 현실성을 되찾는다. 즉 <무슬림>은 <유대인> 자신의 외밀한 중핵(extimate kernel)이며,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영도(零度)이다. 399

무슬림>은 (동물들의 경우와 달리) 단지 언어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무슬림은 언어 일반의 부재이고, 적극적인 사실로서의, 불가능성이라는 암괴(巖塊)로서의 침묵이며 말들이 그것을 등지고 나타나게 되는 배경으로서의 공허이다. 122
[출처] [테마리뷰] 협잡꾼과 사악함의 예술가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고찰|작성자 홍

라캉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발데마르Valdmar 씨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이 사나이는 끔찍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죽었다!” 시련을 뚫고 살아남아 ‘정상적인’ 사회적 삶으로 되돌아온 몇 안 되는 무슬림들이 겪었던 것도 이와 똑같은 한계-체험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그들은 이토록 견딜 수 없는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나는 무슬림이었다.” 122

그 다음으로, 히틀러와 그의 협력자 내부의 핵심 집단은 유대인이 정말로 사악하며 아리안 종족과 인류 전체를 위해 영구히 절멸시켜야만 한다고 <진심으로> 확신했었다는 생각이 있다. 일반 대중들에게 학살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학살 실무자 중 일부가 자신들의 행위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는 사실조차도 히틀러와 내부 핵심 집단의 이러한 <진심>과 상충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 독일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그런 가혹한 조치(유대인의 몰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직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이것이 히믈러Himmler가 1943년 나치의 특수 친위대원들에게 행한 악명 높은 연설에서 취한 노선이었다. 히틀러의 집권에 궁극적 기초를 제공했던 거짓말인 <배신자 유대인 신화> 또한 이런 생각과 딱 들어맞는다. 그것은 1918년 가을 독일 군대는 전혀 패색이 짙지 않았다—1918년 11월 항복에 서명한 것은 <11월의 범죄자들>, 즉 (대부분이 유대인인) 부패한 정치가들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진실은, 두말할 것도 없이 1918년 가을에 독일군은 붕괴하고 있었으며 독일 국경은 돌파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독일 장군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승리를 목전에 두고 등 뒤에서 칼을 맞았노라고 주장했지만 실은 정치가들이 모종의 조치를 취해, 불명예스럽게 도망가는 꼴을 보이는 대신에 군대를 이끌고 행진하며 귀환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군사적 패배를 대한 대중의 경멸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체면을 지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정치가들에게 압력을 넣었던 장군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배반을 당했노라고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정치가들의 등 뒤에 비수를 꽂았다. 히틀러를 창조해낸 것도 바로 이 거짓말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 있었고 패전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환각의 부름 속에서—그 목소리는 히틀러에게 <독일의 패전은 정치가들이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은 탓이다. 따라서 너의 임무는 이러한 배신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그에게 장래의 전망을 열어주었다. 98-99

하여 홀로코스트는 하나의 신비라고만, 우리 문명의 어둠의 심장부라고만 말해질 뿐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수수께끼는 역사화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바깥에 자리한 채, 그에 대한 지식과 기술(記述)을 불허하여 소통할 수 없는 것이 됨으로써 모든 (해명적) 답변을 한발 앞서 부정해버리는 것이다—(이야기의) 우주에서 홀로코스트는 블랙홀의, 공허의, 종말의, 내파의 표지이기 때문에 설명될 수도, 가시화될 수도, 재현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다. 따라서 그것을 콘텍스트 속에 위치시키려는, 그것을 정치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들도 홀로코스트의 유일무이상에 대한 반(反)유대주의적 부정의 시도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출처] [테마리뷰] 협잡꾼과 사악함의 예술가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고찰|작성자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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