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희생된 순수한 소년의 비극
- 소설 <데미안>을 떠올리며
대학 입시를 막 끝낸 스무 살이었다, 뭣 모르고 집어든 책 = 제목이 있어보이는 소설 <데미안>이었더랬다.
시간이 지난 지금, 책 속 명언이나 문장다운 문장이 머릿속에 남아있을리 만무하고,
싱클레어/데미안/알을 깨고 나오.../우러나오는대로 살자..
이정도의 교훈만 희미하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며칠을 충격에서 절레절레 했던 생생한 기억은 신기하리만큼 생생하지만.
- 기이이스응<전>결!?
무얼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6 장(chapter)로 이루어진 소설은
중반 3장에 이르기까지 나른하게 읽혀졌다.
헤르만 헤세 또는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꾸역꾸역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일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가끔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상]되는 책이라고까지 한다.)
기승전결로 이야기하자면 6장의 챕터 중 5장까지 주인공을 둘러싼 이렇다 할 만한 갈등이 없었다고 해야할까.
소년 한스가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뭐랄까
뜨뜨미지근한 배경설명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제도와 부모 아래에서 희생당하고마는 수동적인 주인공 성향 탓에
다양한 에피소드 가운데 분노하지 않는 혹은 분노할 줄 모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잠깐, 이게 갈등인가.. 그럼 이제.. 전개쯤 온건가?..
뜨뜨미지근한 기승 전개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노벨문학 수상작에게;;)
물론, 이후 5장 이후 클라이막스 <한스가 여자를 만날때>,
그리고 <술 퍼마실때>의 씬은 놀랍도록 가독성이 발휘되어 감탄하고 말았다.
미소를 머금게까지 하고.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주인공 캐릭터가 내내 답답해서 덮고 싶었는데,
아래 도움글을 읽고 좀 고구마 먹은 느낌이 가셨다.
문광훈 교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독해하면서
“내성적인 사람의 현실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을 두고 “우리 각자의 삶을 그 나름으로 온당하게 꾸리는 것 자체가
기성의 질서에 대한 안티테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전망하면서
그것은 결국 헤세의 문학 세계가 보여주는 바 “소극적으로는 자기를 잃지 않는 삶”을,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기 충실의 삶”을 지향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을 관통하는
“작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의 근본 방향이
“사회성 비판으로부터 내면성과 자연성으로의 복귀”에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이해를 ‘지금 여기에’ 적용해본다면
“내면적 선회를 통한 반성”과 그 반성 안에서
“자신을 보다 책임 있게 구성하면서 삶의 보다 큰 진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의 안과 밖 강연시리즈 : 2015 오늘을 성찰하는 고전 읽기 중
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79162&rid=2892#literature_contents
(실로 나의 리뷰들은 책을 이해하는 데엔, 하등 도움이 되질 못한다는 것을 안다.
책을 이해하기 위함이라면 작품을 볼 수 있는 저정도의 혜안은 있어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마음에
리뷰 쓰기가 부끄럽지만 일단 시작한건 끝내자ㅠㅠ)
- 자유의지를 짓밟는 교육 제도와 기성 세대를 비판
생각지도 못했던 클라이막스를 맞이하고 당황하던 찰나에
마지막 장이 넘어가버렸다.
무자비한 교육제도와 기성 세대의 그늘 아래 수레바퀴에
"아, 이렇게 알게 모르게 깔려버리는구나" 싶어 화가 좀 났다.
권위주의의 허영, 통제를 위한 통제.
즉, 자리를 지키기 급급하여 본질을 보지 못하고 일단 상대를 주저앉게 하고 마는
어리석은 <꼰대>들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도 도처에 널렸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교육 제도에 한한 기성 세대 비판이 아니라,
말 안통하는 직장상사, 목소리크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르신들 등
여러 얼굴을 한 우리 사회 꼰대들을 향한 일침 아닐까.
다시, 고전을 평가절상시켜보자면 이런 이유가 될 것이다.
1800년대 뉴스도, SNS도 없이 종이와 연필만 가졌던 헤르만 헤세가
그 당시의 사회와 현대의 사회, 200년대를 관통하는 문제를 꼬집어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