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오더쿠스] 6. 겨털머리 엘비스

Words
2628
Reading
12 min
Listen
Play
9y

주말에 박하나와 용산에 영화 보러 갔었다. 극장 옆 백화점에는 프라모델을 파는 큰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박하나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 프라모델 샵 쇼윈도를 들여다보았다. 가게 안에는 건프라와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들이 즐비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다 있네?’

신기해하던 참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가게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걸 보았다. 맨 앞에서 걷는 남자가 무리의 리더인 듯 했다. 후줄근한 체크남방과 카고 바지, 메시 소재의 싸구려 러닝화 차림이었다. 남자의 뒤를 따르는 빼빼마른 청년도 못지않게 눈에 띄는 행색이었다. 어깨까지 기른 장발과 면도를 하지 않아 까슬까슬한 턱이 꼭 로빈슨 크루소 같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남자는...... 김웅섭이었다!

“역시 반도에는 제대로 된 물건이 없다는. 그렇지 않습니까 랑그레이님?”

“참, 간만에 일본에서 토시노상이 왔는데 미안하게 됐다, 랄까?”

장발의 로빈슨 크루소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일본어로 쉴 새 없이 뭔가를 지껄이고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오덕후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하잇, 하잇.’ 하면서 굽실대고 있었다. 특히나 김웅섭은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말을 떠듬거리며 외국 바이어 접대라도 하는 것 마냥 살갑게 굴었다.

“웅군도 기억해둬.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선진사회가 아니라는. 마법소녀 마도카가 아무리 훌륭해도 리리컬 나노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랄까?”

“하잇!”

아하. 김웅섭 이자식, 인터넷 아이디가 웅군이었군? 나는 어느 샌가 오덕후들의 대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인간들, 말투가 왜 저래?

“정말이지, 슈진가 쇼쿠닌 세이신 가 나이!(주인장이 장인 정신이 없다는!)”

왁자지껄한 오타쿠들과 함께 있는 김웅섭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만큼 신이나 보였다. 멀어져가는 오타쿠 무리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하나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해봐. 저기 김웅섭이 있어.”

하나는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타쿠 무리를 본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자.”

그녀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김웅섭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자기 몸집만한 백 팩에는 코팅한 미소녀 그림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나중에 들은 얘기긴 하지만, 김웅섭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예상 밖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네.”

박하나가 말했다. 그녀가 날카로운 언변으로 김웅섭의 환부를 냉정하게 도려낼 거라 생각했던 나는 솔직히 당황했다.

“김웅섭이 평범하다고?”

“그냥 평범한 중2병이야. 사춘기에 누구나 겪는 자의식 과잉이지. 지금 제법 어른스러운 척 하고 있는 우리도 한때는 다 겪었던 과정이란 말이야. 다만 웅섭이의 경우는 중2병을 벗어던져야 할 시점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거야. 걔는 오타쿠니까.”

“도대체 네가 생각하는 오타쿠란 게 뭐야?”

물론 오타쿠의 사전적 정의는 나도 잘 안다. 나는 다만 그녀의 견해가 듣고 싶었다.

“오타쿠에는 물론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공존하고 있어. 이를테면 리니지를 개발한 송재경 같은 경우도 유명한 오타쿠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대박 게임을 만들어 돈을 쓸어 담았지. 근데 김웅섭은...... 오타쿠의 수많은 특징 중에서도 부정적인 면들만 모아놓은 오덕후라고. 오덕후들이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평범하거나 별 볼 일 없는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설정이야. 지구를 구할 거대로봇의 파일럿으로 10대 소년을 뽑는다거나, 미소녀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인공을 좋아한다거나, 어떤 아이템이나 멘토의 도움으로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그런 거. 오덕후들이 열광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우연한 계기를 통해 강자가 되곤 해. 오덕후들은 그런 식의 자기기만, 내지는 자기 합리화에 익숙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김웅섭이 단순 중2병 환자고, 걔가 하는 이상한 행동들도 결국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이거야?”

“그런 셈이지. 너 세훈이 알지?”

세훈이라면 모르는 애가 없는 학교의 유명인사다. 키가 크고 매끈하게 생긴데다 공부도 잘한다. 나는 하나가 세훈이 얘기를 꺼내자 내심 알 수 없는 질투심이 들었다. 키도 보통이고 얼굴도 평범한 내가 세훈이와 사랑의 레이스를 펼친다면 결과는 보나마나 내 패배일 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하나는 천연덕스럽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세훈이가 지금이야 훈남이 되었지만 중학교 때만 해도 완전 찌질했어. 키만 크고 꾀죄죄한데다 성격도 얼마나 소심했는데. 오죽하면 초등학교 시절 별명이 트롤이었겠니.”

“트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괴물 있잖아. 바보 같은 거인. 세훈이는 트롤이었어.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가서부터는 공부도 운동도 엄청 하기 시작하더라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고, 그렇게 꾸미다 보니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하나의 말을 들은 나는 이세훈의 외모를 떠올렸다. 스타일리쉬한 짧은 머리와 이지적인 뿔테 안경 너머에 그런 과거가 감춰져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하나가 말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을 볼 때면 보통 어떤 생각들을 할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결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지. 얼마나 노력했으면 저렇게 뛰어날까? 저렇게 인기가 많은 걸 보면 자기 관리에 철저하겠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김웅섭 같은 타입은 달라. 오덕후들은 항상 결과만을 주목하지. 나에게는 왜 기회가 없을까? 왜 나는 운이 없을까?

오덕후들은 타인의 성취에만 관심을 가지곤 해. 성취를 이루기 위해 흘린 땀은 생각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세훈이에 대해 김웅섭이 보일 반응도 대충 예상이 가능해. 불평을 늘어놓거나, 다른 분야에서 위안거리를 찾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의 성취를 깎아 내리는 거지.”

“그렇게 보면 김웅섭이 스스로에게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 믿는 것도 납득이 가네.”

“그래. 금방 알아듣는구만.”

하나는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머리를 숙여 하나의 손길을 떨쳐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야! 아까부터 왜 자꾸 만지냐?”

“왜? 우리 사이에 좀 만지면 안 되냐?”

하나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나는 요즘 부쩍 통통하게 살이 오른 옆구리를 들킬까봐 몸을 배배 꼬며 도망 다녔다. 나는 하나의 적극적인 스킨십이 싫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오늘 밤의 박하나는 분명 평소와 다르다. 가끔은 누나 같기도 하고, 때로는 발랄한 여동생 같기도 한 그녀는 매력 있는 여자였다. 그걸 알면서도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망설이는 건 아마 내가 실패한 연애를 겪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뿐이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는 웃으며 볼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건 여러모로 씁쓸한 경험이었다. 그걸 깨달은 뒤로 나는 늘 그녀의 행동에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김웅섭은 그런 애야. 오덕후는 원래 합리화와 자기기만의 화신들이거든. 어느 날 갑자기 데스 노트를 줍는다거나 생명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제 뜻대로 남의 삶을 좌지우지한다는 일본 만화들, 유치하지 않니?”

박하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순간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쩐지 조롱하는 것 같은 하나의 말투는 다정하고 착한 그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와 오덕후의 생리에 대해 대화를 나눈 다음 날, 학원에서는 제법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오후 수업시간에는 사회 선생님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이 국제사회에 행사한 영향력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사회 선생님은 약간 시대착오적인 운동권 성향이 있었는데, 그 노골적인 정치성향을 드러내느라 수업도중 곁가지로 세는 경우가 잦았다. 사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말 미국이 국제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국가라고 생각하나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쭙잖은 지식을 뽐내던 김웅섭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김웅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미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비록 미국이 한국 전쟁 때 우리 나라를 돕긴 했지만, 그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미국한테 고마워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자기네 이익을 위해 전쟁을 했는데 우리가 왜 고마워합니까? 국력이 좀 강하다고 해서 함부로 나대는 꼴이 재수 없지 않습니까?”

궤변 같은 열변을 토한 마친 김웅섭은 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던 그때, 강의실 구석에서 조곤조곤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네 면상이 더 재수 없어.”

강의실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강단 위의 사회선생님도 배를 잡고 웃을 정도였으니. 뒤늦게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웅섭은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책상 위에 몸을 웅크렸다. 김웅섭은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까지 벌을 서듯 그렇게 교재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천하의 김웅섭을 찌그러뜨린 건 심민경이었다. 학원에서 늘 1등을 독차지하는 예쁘장한 여자애다. 불현 듯 지난번 중국집에서 김웅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양선생과 맞선 이후 심민경이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어. 나는 알 수가 있지.’

그렇게 호언장담 하던 김웅섭이었는데. 쉬는 시간에도 심민경은 노골적으로 김웅섭을 비웃었다. 자기 친구들과 킥킥대며 김웅섭을 손가락질했다. 오타쿠, 또라이, 관심종자. 비록 귓속말의 형태를 띠고는 있었지만 심민경의 속닥거리는 소리는 강의실 반대편에 앉은 나한테까지 들릴 정도였다. 김웅섭은 그런 심민경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멍하니 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무룩한 김웅섭을 보니 새삼 측은하긴 했다.

그때 심민경과 친한 여자애 하나가 김웅섭에게 다가갔다.

“민경이가 원래 장난기가 좀 많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짧게 한마디 건넨 그녀는 다시 심민경에게 돌아갔다. 여자애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강의실을 떠났다.
김웅섭에게 위로를 건넨 여자애는 김진의다.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가 많았다. 눈에 띄게 예쁜 외모도 아니었고 옷차림도 수수했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언제나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김진의는 드물게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다. 아마 그녀가 김웅섭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인간적 연민에서 비롯된 위로, 한없이 무안했을 김웅섭에 대한 역지사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김웅섭의 눈치를 살폈다. 김진의의 말을 들은 김웅섭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빨개져 있었다.

기현상이 일어난 것은 다음 날이었다. 김웅섭이 머리에 젤을 바르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김웅섭의 또 다른 별명은 ‘겨털머리 엘비스’다. 심각한 곱슬머리가 꼭 겨드랑이 털 같은데다, 턱 끝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구레나룻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곱슬곱슬하고 뻣뻣한 김웅섭의 모질에 젤을 바르는 건 무광을 유광으로 바꾸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물론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과도 거리가 멀다. 짐작컨대 아버지가 쓰시는 젤을 몰래 바르고 나온 것 같다.

옷차림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는데, 늘 입고 다니던 캐릭터 티셔츠 대신 무난하고 점잖은 셔츠 차림이었다. 내가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데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학원에선 김웅섭이 김진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김진의가 김웅섭에게 말을 건네는 걸 지켜보았던 이들 대다수는 이미 심증을 굳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날은 김웅섭이 먼저 내 옆자리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넸다.

“여어, 좋은 하루.”

“우리 30분 전에 같이 저녁밥 먹었잖아 병신아. ‘여어’는 또 뭐냐?”

“뭐, 내 말은 그냥 인사나 하자는 거지.”

김웅섭은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가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리를 꼬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김웅섭은 여자애들이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며 자꾸만 끈적끈적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그런 김웅섭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일관성 있는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최소한 ‘독특한 아이’로는 남을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의 여자 따위 관심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김웅섭이 아니었던가? 그의 전향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경멸을, 더러는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특히나 양선생은 김웅섭을 마주칠 때마다 야릇한 미소를 짓곤 했다.

“어이, 김웅섭이. 머리에 젤 발랐네? 이놈 이러고 보니 아주 잘 생겼는데? 어디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생겼나?”

김웅섭은 악의가 가득한 양선생의 농담에 얼굴이 빨개져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쉬는 시간에 그를 붙잡아 편의점으로 끌고 갔다. 김웅섭은 여느 때와 달리 무척이나 초조해보였다. 나는 음료수를 사서 그 놈의 도라에몽 같은 손에 쥐어주었다.

“야. 너 요즘 그 게임 안 해? 페이트?”

“어, 어? 해야지.”

김웅섭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너 좋아하는 애라도 생겼냐? 무슨 딴 생각이 그렇게 많아?”

“무슨 소리냐. 이 몸은 현실의 여자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김웅섭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과장된 그의 태도에 나의 의심은 확신으로 탈바꿈했다. 소문은 며칠이 지나자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김웅섭이 언제 김진의에게 고백을 한다더라, 고백할 때 줄 선물을 사려고 돈을 모은다더라, 알바를 뛴다더라, 혹은 이미 차였다더라 등등. 이쯤 되면 김웅섭보다 김진의가 더 걱정이다. 하필이면 스캔들의 상대가 전교권 찌질이인데 그 부담감이 오죽할까?

나는 행여 김웅섭이 김진의에게 요란스런 고백이라도 할까 두려웠다. 그래도 몇 주간 같이 보충수업을 들은 사이인데,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도의적 책임감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김웅섭이 김진의에게 고백하는 타이밍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뜯어 말리는 건 차후의 일이다.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김웅섭은 정말 쿨한 놈인가? 우리가 가진 것들에는 관심이 없는가?’ 항목에 큼직하게 X표를 그렸다.

쉬는 시간에 나는 하나에게 김웅섭이 김진의를 좋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평소의 생글생글하던 모습과 달리 하나는 이제 슬슬 질린다는 듯한 태도였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녀가 쏘아붙였다.

“너는 참 오지랖이 넓어.”

“불쌍하잖아. 만약에 공개적으로 망신이라도 당하면 어째?”

“걱정하지 마.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왜? 그럼 넌 두 사람이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야?”

“미쳤냐? 당연히 그럴 리는 없지.”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하나가 말했다.

“김웅섭은 절대 고백 못해. 그런 찌질이 오덕후가 지금 상황에서 그럴 용기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욱하는 마음에 저지르면 어떡해? 그 놈 의외로 용기 있던 걸”

나는 학원수업 첫 날 제법 강단 있게 양선생에게 맞서던 김웅섭을 떠올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박하나는 콧방귀를 뀌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객기지. 기본적으로 오덕후는 겁쟁이들이야. 경쟁이나 노력을 두려워하고 막연히 강해지기만을 바라지. 과정 따윈 없이 일단 자기가 하기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 그런 놈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정당하게 도전할 용기 따윈 없어. 현실로부터 매번 도망치는데 자기가 처한 현실이 제대로 보일 리 없지.”

하나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밀리터리 오덕후들이 떠올랐다. 독일군 군복을 구해 입고 단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 역시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화려한 제복에 열광하는 건 아닐까?

“밀덕! 네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로 밀덕들이 있어!”

“맞아. 밀덕들은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강해지기 위한 노력을 감내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힘들어 보이는 나이프나 총기류에 열광하는 거야.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데 근육은 필요 없으니까. 현실도피에 익숙한 오덕들이 현실의 여자에게 고백할 용기가 있을 것 같니? 여자는 때론 나이프나 총보다 위험해. 총은 그 자체론 가치중립적이지만 여자들에겐 감정이 있어. 인간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지. 오덕들이 가장 취약한 게 바로 소통이잖아.”

“이를테면, 여자란 오덕후들이 가장 취약하고 두려워하는 지점에 서있는 존재들이라 이거군.”

나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누군가 말했듯,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도가에서 그러지 않던가? 인간은 사랑을 받으면 강해지고, 깊은 사랑에 빠지면 용기가 생긴다고. 현실의 여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아니고, 페이트는 더더욱 아니다. 늘 상냥하지도 않고, 틱틱대는 듯 챙겨주는 일도 드물며, 아무 이유 없이 일편단심 한 남자만 쫓아다니지도 않는다.

내가 아는 한, 현실세계의 여자는 남자 이상으로 잔혹하고 이기적인 면모가 있다. 어쩌면 롤리타 콤플렉스도 그런 현실을 두려워한 남자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모른다. 거절당해도 부담스럽지 않고, 쉽사리 반항하지도 않으며, 여차하면 힘으로 제압해서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자.

나는 작년 이맘때쯤 잠깐 사귀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헤어지자는 말에 별 수를 다 쓰며 매달려도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김웅섭은 진의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걸까?’

모르긴 해도 첫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포용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게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호르몬의 작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에 잠긴 내 얼굴을 바라보던 하나가 말했다.

“너 예림이 생각했지?”

“아닌데?”

“뻥치시네.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참고로 예림이는 내 전 여자 친구의 이름이다.

다음 날 학원 수업이 시작하기 전, 김웅섭은 뭔가 작정이라도 한 듯 학원 정문 앞을 서성거렸다. 제법 결연한 표정의 김웅섭을 보고도 나는 어제만큼 걱정이 되진 않았다. 첫째로는 그의 손에 꽃다발이나 선물 보따리가 들려있진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에게는 진짜로 김진의에게 고백할 만한 배짱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학원 아이들은 어느덧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무리지어 김웅섭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치 곧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시작되기라도 할 것 처럼. 그리고, 김진의가 나타났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수수한 교복 차림이었다. 내 눈에 김진의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고생일 뿐이었지만 김웅섭은 그녀가 정말로 예뻐 보였나보다. 김진의가 나타나자 김웅섭은 다소 뻣뻣하게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 손바닥으로 젤 바른 옆머리를 누르며 초조하게 다리를 떠는 모습에 지켜보는 나까지 오금이 저렸다. 김진의는 김웅섭을 마주치고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갈색 뿔테 아래로 조금 당황한 듯한 눈빛이 느껴지긴 했지만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의 정신력이 부러웠다.

김웅섭은 김진의가 스쳐지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복도 한가운데 멍청하게 서있는 모습이 버려진 마을의 오래된 표지석 같았다.

“돌아서! 돌아서서 말을 걸라고!”

멀찍이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혼잣말을 속닥거렸다. 아이들은 다시금 한마음이 되어 김웅섭을 응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도가 선하지 않다는 걸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웅섭은 멀어지는 김진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게 전부였다. 고백은커녕 가벼운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김웅섭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빅뉴스를 기대하던 녀석들로썬 제법 맥이 빠졌겠지만 나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혹자는 김웅섭이 학원 수업 후에 뭔가를 할 것이라 예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박하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 이 마당에 무슨. 김웅섭은 양선생과의 보충수업이 끝난 뒤 터덜터덜 혼자 집으로 갔다.

김웅섭은 곧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젤 바른 유광 겨털머리는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티셔츠엔 전보다 더 큰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사건 이후 김웅섭을 향한 아이들의 관심은 사그라졌고 양선생은 침울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았고 세상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그를 찾아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질문을 했다.

“웅섭아. 너 여자한테 고백해본 적 있냐?”

“내가 말했지. 현실의 여자에겐 관심 없다고. 여자 따위에 돈 쓸 바에 아키하바라에 가서 피규어를 하나 더 사겠다. 너, 아키하바라가 뭔지는 알지?”

“현실의 여자를 좋아해본 적이 전혀 없어? 예를 들면, 너한테 잘 해준 여자라던가.”

내 질문이 정곡을 찔렀던 걸까? 나는 김웅섭이 순간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긴 한숨을 내쉰 김웅섭이 대답했다.

“넌 그냥 내 친한 친구니까 말해줄게. 사실은 나도 딱 한번 현실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어. 애가 요즘 애들답지 않게 참하더라고. 나한테 말도 먼저 걸고 호감이 좀 있는 것 같더라. 너도 알다시피 난 사실 여자를 밝히는 남자가 아니잖아? 그런데 그쪽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나름 호감이 가지 않겠냐? 그래서 며칠 그녀를 지켜봤지. 그런데 걔가 별로 예쁘지 않더라고. 난 아무 여자한테나 마음 주는 사람이 아니야.”

김웅섭은 제법 시크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행간에 내비친 감정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아쉬워하고 있다. 그의 말끝에서 후회하고 있는 자만이 내비칠 수 있는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웅군’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우리학교 애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김웅섭만의 사이버 공간이었다. 그의 프로필사진을 장식하고 있던 ‘페이트 세이버’는 어디에도 없었다. 커버에는 일본어 대신 한 줄의 우리말 문장이 적혀있었다.

‘가혹하다...... 어째서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운명인 거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웅섭은 속세를 초월한 용기를 가진 놈일까? 아니면 그저 겁쟁이인가?’ 라는 항목 위에
전보다 훨씬 크고 굵게 X표를 쳤다.

[호모 오더쿠스] 6. 겨털머리 엘비스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