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점심시간에 1학년 때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못 보던 사이 병훈이는 같은 반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긴 듯 했다. 나는 병훈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연애 조언들을 잔뜩 해주었다. 한 달 만에 차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도 연애 경험이 있긴 하니까. 다소 과장 섞인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병훈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 며칠 전 운동장에서 녀석이 김웅섭에게 린치를 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병훈이는 참 순둥이 같은 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굴 괴롭힐 녀석이 아니다. 나는 조심스레 병훈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김웅섭이라는 애 아냐?”
“알지. 넌 걔를 어떻게 알아?”
나는 지난 며칠간 보습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김웅섭 때문에 매일 그와 함께 보충수업을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내 말을 들은 병훈이가 얼굴을 붉혔다.
“맙소사. 걔랑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 된다니, 정말 최악이다.”
“그 정도야? 김웅섭이 조금 이상한 녀석이긴 하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누굴 싫어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내가 말을 다 끝나기도 전에 유병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병훈이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잔뜩 흥분해서 김웅섭에 대한 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녀석이야. 묘하게 사람 깔보는 면이 있다니까? 뭔가 잘난 구석이라도 있으면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쥐뿔도 없으면서 매번 사람 속을 긁는다고.”
“김웅섭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니 매번 직접적으로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유병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더듬어 김웅섭의 만행을 돌이켜보는 듯 했다. 유병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조금은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LOL 새 챔프 나온 거 알지?”
“알지. 게임은 잘 안하지만.”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게임은 안하더라도 보통은 그렇게 반응하잖아? 적당히 장단 맞춰주면서. 근데 김웅섭 걔는 완전 또라이라니까. 사실은 지난번에 애들이랑 게임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김웅섭 그 자식이 옆에 와서 가만히 듣더니 갑자기 우리 보고 그런 쓸데없는 거 알아서 뭐하냐는 거야. 아니, 그럴 거면 듣질 말던가, 굳이 왜 와서 끼는 건데?”
“그래서 그렇게 때린 거야?”
“그러고 말았으면 그냥 넘어갔겠지. 근데 갑자기 인생에 대해 훈계를 하기 시작하더라고. 학기 초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말이야. 쓸모없는 게임에나 빠져 사는 우리가 한심하다나? 알고 보니 원래 유명한 놈이지 뭐야.”
솔깃해진 나는 병훈이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아는 한 병훈이는 뒤에서 남을 험담하거나 없는 말 지어내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런 병훈이가 이렇게까지 분개하는 걸 보면 쌓인 감정이 적잖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훈계냐고. 그랬더니 갑자기 AK47이 몇 구경인지 물어보더라. 자기는 너희들이 모르는 걸 엄청나게 알고 있다고, 아마 이 학교에서 자기보다 밀리터리 지식이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하더니 그냥 가버렸어. 여기가 북한이냐? 평생 AK 만져볼 일도 없을텐데 그딴 걸 안다고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
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미움을 자초하는 것도, 얻어맞은 주제에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도 희극적이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김웅섭이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곤 해도, 왜 항상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나서서 매를 버는 걸까? 뜬금없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떠올랐다.
‘희극이 롱샷이라면, 비극은 클로즈업이다.’
비극에도 사연이 있는 법. 그녀석의 삶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병훈이와 달리 나는 어쩐지 그 놈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며칠 뒤 우연히 만난 김웅섭은 언제나처럼 그 요상한 일본 애니메이션 게임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다가간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야.”
“하잇?”
김웅섭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못생긴 얼굴이다. 세수는 하고 다니는 건지,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했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내가 말했다.
“수업 끝나고 매점 가서 빵이나 먹자. 내가 살게.”
“싫다. 요즘 좀 바빠서 나를 위해 쓸 시간도 거의 없단 말이야. 나만의 특별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아.”
“어, 그래.”
내심 그가 반길 줄 알았지만 김웅섭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머쓱해진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이자식, 아웃사이더 주제에 건방지게 도도하다. 나는 묘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하면 김웅섭과 친해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