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세대의 독일인들에게는 독일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것은 전혀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독일 역사는 게르만 족과 게르만 족들이 벌였던 로마와의 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9년에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케루스커족의 헤르만이 토이토부르거 숲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파한 독일의 영웅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트몰트 근처에 세워진 그의 기념탑에 있는 칼에는 황금으로 된 문자로, "독일의 통일 - 그것은 곧 나의 힘이고, 나의 힘 - 그것은 곧 독일의 힘"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독일 역사에는 헤르만과 그가 승리한 전투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하나의 커다란 선이 있었다. 여기에는 독일의 전설이나 동화에서 '베른의 디트리히'로 칭송되고 있는 고텐족의 왕인 테오데리히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되어 로마인들의 제국을 일종의 독일 제국으로 바꾸어 놓았던 칼 대제가 등장한다. 그 뒤를 이어서는 호헨슈타우펜 왕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와 그의 손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나타나는데, 이 두 황제는 신비스럽게도 하나의 인물로 합쳐져서, 마법의 산인 키프호이저에 잠들어 있다가 곤궁에 처한 독일을 구하기 위해, 어느 날엔가 다시 나타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독일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마르틴 루터와, 그의 제국에서는 해가 지지 않았다는 황제 칼 5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과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가 등장하고 있다. 프로이센의 왕과 오스트리아의 여황제가 싸움을 벌였을 때는 독일인들 사이의 내분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다. 그 후에는 슈타인 백작과 '진격의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 장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는데, 그는 옛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직접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독일 제국을 만드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독일인들은 유구하게 이어져온 독일 역사의 대열에 서 있는 대표적 인물들의 면면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독일 역사가 프리드리히 마이네케가 '독일의 파국'이라고 불렀던 히틀러 제국과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이로인해 1945년 이후의 독일 민족 국가는 점령과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한때 스위스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독일의 역사를 '승리의 색깔로 칠하는' 독일 역사가들의 성향을 비꼰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 승리의 색깔도 빛이 바랬거나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독일 역사를 일정한 의미의 연관 관계 속에서 파악했던 역사 서술도 사라지고 말았다. 일사불란하게 상승하기만 했던 게르만, 독일 제국의 황금빛 신화는 완전히 잘못된 독일의 역사 발전, 즉 독일의 '특수한 길(Sonderweg)'이라는 검은 신화에 의해 대치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독일의 민족사를 쓴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알프레드 호이스의 표현대로 '역사의 상실'을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독일의 역사를 '특수한 길'의 역사로 파악했던 사람들의 눈에는 독일의 진정한 실체는 제 3제국과 제 3제국의 만행에 있는 것처럼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서독 국민들은 고도의 산업 성장과 점증하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의식 속에서 배제하거나 지워버리고 현재만을 즐기는 데에 만족하였다. 그러면서 서독 국민들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원칙이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고 또 날마다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약간은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독일인들은 세계 정치의 최전방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린 정치적 결정에서 내심으로 진정 원했던 것은 제발 혼자 내버려두고, 어떠한 결정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동독 국민들은 공산당 정치국, 당의 이데올로기 이론가들이 만들어서 강요하는 역사를 아무런 토론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또 이렇게 해서 받아들여진 역사 시각은 정치적 상황에 맞추어 수시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독일 국가가 탄생하게 되자 안락했던 국내적 번영의 상황과 일체의 외교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행복한 상황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 새로운 독일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럽이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로서는 자신들의 시민들에게는 물론 유럽 시민들에게도 독일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유럽의 한복판에서 독일이 하나의 미래를 갖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우리는 독일의 현재가 놓여있는 과거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어떤 것도 과거와 무관하게 시작할 수 없다. 다만 언제나 과거와의 연결을 통해 삶과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전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그들이 정작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새로 쓴 독일 역사, 하겐 슐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