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조는 서촉을 거저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까요?
서촉의 주인인 유장의 신하였던 장송은 유장의 기량이 부족하다고 여겨 촉땅의 새 주인을 찾아 지도까지 들고 조조를 방문합니다. 적벽대전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사실 이 역시도 적벽대전 못지 않게 삼국의 운명을 가른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삼국연의의 기술을 보면 장송은 키도 짤막하고, 콧대도 낮은 데다 뻐드렁니까지 난 대단한 추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장송의 말투는 상당히 불손하고 건방졌다고 합니다. 서촉 땅을 바치겠다고 왔으니 자기 딴에는 자뭇 의기양양했겠죠.
"사람됨이 짧고 작으며, 방탕하고 절개와 지조를 익히지 못했다."
이것이 당대 사서의 기록입니다. 인격적으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머리는 산발에다가 좀 괴팍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오타쿠 해커 타입으로 비유해볼 수 있겠군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걸로 치면 조조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게다가 조조는 공융 같은 샌님 선비 타입은 싫어했지만 의리 같은 걸 중요하게 여겨 관우를 환대했고, 비록 자기와 맞서 싸운 적장이라도 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을 중용하는 등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호불호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배신자에, 자기 재주를 믿고 오만방자한 장송. 아마 조조 입장에게는 불호(不好) 그 자체였을 겁니다. 당시 조조는 승전을 거듭해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상황. 아마 장송에 대한 조조의 심리는 다음과 같았을 겁니다.
"난 너 같이 성격 이상한 배신자 놈 비위 안 맞춰도 내 힘으로 천하통일 할 수 있어, 꺼져 이 새끼야!"
결국 조조는 장송을 쫓아내고 맙니다. 조조에게 쫓겨난 장송은 형주의 유비에게 향했고, 유비는 장송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에 감명 받은 장송은 유비에게 서촉의 지도 뿐 아니라 당시 복잡하게 꼬여있던 서촉 내부의 동향은 물론 병력, 인마, 물산, 지형 등 각종 고급 정보를 넘겨주죠. 이런 고급 정보를 입수한 유비는 결국 서촉을 정벌해, 오래 전부터 꿈꾸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현실로 만들어냅니다.
만약 조조가 서촉을 넙죽 받아먹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비는 언제까지고 형주에만 머물러야 했을 것이고 한중왕이 되어 조조를 위협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위나라 국력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던 촉나라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촉 땅의 험준함 때문이었던 걸 감안하면, 장송의 서촉 진상 거절이야말로 적벽대전의 패전과 비교도 할 수 없던, 조조의 가장 큰 실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회적으로 뭔가 이룬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호불호가 강한 캐릭터가 많습니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일수록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쉽고, 때로는 나르시즘마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카리스마로 보일 수 있죠. 특히 사업가나 예술가 쪽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앨런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가 사석에서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고, 고흐가 피카소 역시도 성격적으로 무난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습니다. 창업 군주임과 동시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조조야말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인물들이 결국 정치 지도자 감은 아니라는 점에서, 조조는 뛰어난 문인이자 군략가였을지는 모릅니다만 애당초 황제감은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홍준표가 야당 대표는 할 수 있어도 대통령 감은 분명히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홍준표는 자기 스스로 인정하듯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렇지 않으면 속병이 생겨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타입의 사람입니다. 그런 화끈한 성격으로 인해 흙수저 출심임에도 이 악물고 공부해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모래 시계 검사로서 이름을 날렸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지도자로서의 덕목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된 사람은 약간 눌변이고 가끔은 답답해보이기도 한 문재인이죠. 두 캐릭터의 극명한 차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 전술한 지도자 감이 무엇인지를 더 명확히 보여주는 다음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초한지에 나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죠.
유방: "나는 얼마만큼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가?"
한신: "폐하는 십만 명쯤을 지휘하실 수 있습니다."
유방: "그럼 너는 어떠하냐?"
한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유방: "그렇게 뛰어난 네가 왜 내 포로가 되었느냐?"
한신: "폐하는 병사의 장수가 아닌 장수의 장수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힘입니다."
얼핏 특출난 재능은 없어보이지만 여러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사람 간의 갈등을 중재하며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소위 덕(德)이 있는 인물. 그런 점에서 황제감에 더 가까웠던 인물은 유비입니다. 사실 조조보다 훨씬 더 많은 배신을 한 유비를 아무도 배신자라고 기억하지 않는 것은 그가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한 적이 없음을 의미하고, 이는 그가 감정적으로 일을 그르친 사례가 없음을 뜻하죠.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 부유한 권세가 출신의 조조보다 그 출발점이 훨씬 뒤에 있었다는 약점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며 인내를 길렀던 강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지금 같은 SNS 시대였다면 아마 승자는 조조가 아니라 유비가 되었을 겁니다.
결국 조조는 끝까지 자기 싫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호불호가 강한 그 캐릭터를 바꾸지 않았죠. 후회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것은 온전히 자기 선택이긴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더 많은 것을 원했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바꾸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촉한의 계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조위의 사직이 결국 사마의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사마씨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후손들이 비참하게 살해된 것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습니다.
원래부터 온화하고 인자한 사람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운동 선수나 연예인이 아닌 이상은, 둥글둥글하기만 한 사람, 또는 감정적으로 무디기만 한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어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소위 인내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젊은 시절을 보면 다 한 성깔 하는 경우가 많았죠. 전에 쓴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격한 성정이 강한 동기 부여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사람은 인화를 통해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영화 <비열한 거리>의 명대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만 알면 돼. 너가 원하는 것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결국 대다수 사람에게 인생이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것을 얻는 것이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성정이 도움이 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에는 감정이 방해가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조조처럼 천하통일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논해보고자 이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자기 몸 건사하며 살기 위해서라도 이런 인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유튜버 청화수님은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의 삶을 분석하며 아래와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때로는 남자답고, 호쾌하고 작은 것에 구애 받지 않는 그런 것도 중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사바세계를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삼가고 신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조심하는 것이야 말로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니까요. 사바세계란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이란 얘기죠. 그게 현세입니다. 참고 견디기 싫다면 이 현세를 떠나야 하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참기, 절제하기, 억제하기, 견디기 이걸 못하는 사람들이 이 사바세계를 더 빨리 떠나게 되는 것 같아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게 그렇습니다. 참고 견디고 억제하는 것이 사바세계의 본질이다, 절제하고 억제하는 사람이 이 사바세계에 보다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즉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이 사바세계의 본질인 것이죠. 그것이 이 사바세계에서 보다 더 오래, 보다 덜 고통스럽게,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린 보통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을 억누르고 하기 싫은 일을 힙겹지만 해나가는게, 진정 우주의 본질에 따르는 조화로운 삶이다, 즉 억울해 할 게 없다는 거죠. 우주 만물은 다 그렇게 절제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청화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바로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 거는 자기 최면이자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써 이 말을 남겼다고 밝혔죠.
저 역시도 자신을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호불호가 매우 강한 편입니다. 물론 절박한 필요 때문에 여러 차례 저 자신을 바꾸기도 했습니다만 사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산 편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아서인지 오래 전 원하는 것을 거의 다 현실로 만들어보았죠. 20대 말, 나는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봤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별다른 여한이 없다는 소회를 남긴 적이 있는데 그 시점에 한해서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죽었다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제법 괜찮은 이야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몇 년이 지나고보니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 있더군요. 작년 저는 지독한 실수를 몇 개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전 시기에 있어 통용되던 방식이 더 이상은 먹히지 않는 것을 분명히 목도했죠. 그것을 보며 내가 나이가 먹었다는 것, 인생 2막을 맞이함에 있어 지금까지 써왔던 방식을 고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자기 감정대로, 극명한 호불호대로 움직이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진심을 더 잘 드러내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관찰하기로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전략입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테마주나 암호화폐에 전재산을 걸어서 성공하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긴 인생이라면 순간의 결과가 아니라 전반적인 확률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짧은 삶은 물론이고, 지금껏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에서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교훈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아마 맞겠죠. 성공가능성이 낮은 길을 주 전략으로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무엇을 배움에 있어서는 형(形)을 익혀 형(形)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감정을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을 쓴다는 것, 꼭 참고 인내한다는 그 정석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일단 감정이라는 걸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고려해볼 수 있는 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기다리지 못해서 놓치는 것이 기다렸기 때문에 놓치는 것보다 훨씬 많더군요.
대단한 목표 달성을 희망하기 때문에 이 글을 남긴 것은 아닙니다. 저는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게 인생이라는 그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에, 지금 순간의 작은 감정 충족이 아니라 자기 삶을 관통하는 어떤 욕망을 향해 감에 있어 적어도 자기를 컨트롤하지 못해 기회를 놓쳤다는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아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어떤 안도감을 얻고 싶어 앞으로는 호불호를 벗어난 행동도 하며 살까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