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독감

admljy19(62)
Published in
#kr
Words
319
Reading
2 min
Listen
Play
9y

참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독감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 「군계」에는 '몸이 죽으면 마음도 죽는다.'는 명대사가 있는데, 삶에 대한 자신감이란 것도 건강할 때나 잠깐 반짝이는건가 봅니다. 몸이 아프면 생각도 죽더군요.

참 안 좋게 헤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 지나간 감정인줄 알았는데, 머리에 열이 오르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오르더군요. 증오가 몽롱한 약 기운을 헤짚고 머리를 일직선으로 뚫고 들어와, 전화를 걸어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내야 했습니다. 따지고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많은데. 그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 잘못한 것만 떠오르더군요.

참 유치한 사람이네요......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참 별 수 없습니다.

겨우 독감에 걸린 것으로도 이런데, 만약 나중에 암이라도 걸려 병실에 누워있을 때는 얼마나 많은 감정에 휩싸일까 걱정이네요. 인생에서 받은 상처라는건 두꺼운 딱지가 앉아 아프지 않은 것 뿐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떼어내면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언젠가는 추하게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점에서 사람은 결국 지는 게임을 발버둥치며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난 척 해봤자 끝내는 완전히 패배할 것입니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고 막 살다 죽는 것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고작 인간 나부랭이가 오래 참고, 더 생각한다고 꼭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세워놓은 계획은 간 데 없고 다 팔자대로 되더라고요.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소소한 재미를 찾는 것 뿐인데, 인생을 게임에 비유할 때 제게 있어 그 재미란 그래도 아무렇게나 조이스틱을 돌리는게 아니라, 뭐가 나올지는 몰라도 적어도 움직이는 방향 정도는 스스로 컨트롤 하는데 있다는 일종의 아집(?)이 있어서, 앞으로도 여과 없는 감정이 저를 지배하게 놔두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언제 「GAME OVER」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조종한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Valar Morghulis)」는 명제에 대한 명답, 「그래 맞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not today)」와 비슷한 관점일지도 모르겠군요.

전 운명주의자입니다. 자유의지라는게 정말 있는지를 의심할만큼. 하지만 그와 별도로, 저는 앞으로도 제 의지대로 온전히 제 삶을 살아낼 생각입니다. 문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전 앞의 두 문장이 서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회복했으니 책도 더 열심히 읽고 스팀잇도 꾸준히 하고, 어차피 그대로 안 될 게 뻔하지만 계획도 좀 더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래야겠습니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