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소설] 파워게임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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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5일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

"아냐 아직 안 끝났어."
이바노프의 입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새 찬 눈보라가 입가에 흐르던 피를 응고시켰다. 짭짤한 맛이다. 도착지까지는 오십 키로 가량 남아있다.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았다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지독한 날씨가 꼭 살아야겠다는 그의 의지를 지워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살아 있다는 자각 자체를 희미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감각해진 것은 다리 감각만이 아니었다.
머리만 깨질듯 아팠다. 누군가 두꺼운 철사를 그의 머리가죽에 두르고 전기 고문을 하는 것 같았다. 수면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달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껏 움직여왔다. 멈추면 반드시 죽는다. 동료들은 모두 죽었다. 적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동료들의 머리에 총을 쏘았고 늘 그래왔듯 피부조각을 벗겨내었다. 피부에 작은 칩 따위는 숨겨 두지 않았다는 동료들의 호소는 묵살되었다. 그 중에는 일류제도 끼어있었다. 유일한 여자 동료로 군율을 어겨가며 비밀스레 교제한 그녀였다. 이제는 추억마저도 비참한 것이 되었다. 살가죽을 벗기는 서걱거리는 소리와 그녀의 울부짖음에 이바노프는 수십차례 머리를 바닥에 찍어야 했다.
그 지옥을 탈출한 것은 이바노프뿐이다. 빠져나온 것도,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기적이다. 그는 수용소의 개들에게 냄새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한겨울에 벌거벗은 채로 탈옥을 감행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마흔 일곱 명을 죽였고 두개의 국경과 삼천키로가 넘는 거리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집요한 적들은 이바노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탕 탕 탕.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귓가의 이명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거센 눈보라와 이바노프의 떨어진 신체 감각을 감안해도 소리의 진원지와 이바노프의 거리는 꽤 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여하간 물리적으로 적이 이바노프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이대로는 곧 따라잡힐 것이다. 아직 의식이 있을 때 무언가를 결정해야 했다. 이바노프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른쪽 100여 미터 정도 거리에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이바노프는 그곳에 숨기로 결심했다. 적들은 심장 박동 센서기까지 들고 와서 풀 하나까지 샅샅이 뒤지고도 남을 작자들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곳에 숨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숲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흐릿하게만 들리던 총소리가 명료하게 울리더니 급작스레 머리 위 나무 가지로 총알이 박혔다. 귀에 통증이 느껴진 것은 불현듯 청각을 자극한 소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총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솜씨 좋은 저격병의 총탄이 간발의 차로 빗나간 것일까. 하지만 총알이 더 날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성질머리 더러운 놈이 위협용으로 아무렇게나 쏴댄 총알이 우연히 도달한 것으로 믿을 수밖에.
그는 포복을 한 채 간이 토치카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얼어붙은 땅을 파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겨우 파낸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눈이 옷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너무 시린 탓에 그는 그만 권총을 꺼내 관자놀이를 겨누고 말았다.
'하나, 둘, 셋.'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자살하는 것을 그만둔 그는 나뭇가지와 흙으로 토치카를 덮고 시야와 발사각을 확보할 수 있는 작은 지지대를 설치했다. 머지않아 적들이 온다. 급조한 이 토치카에 잠깐이라도 속아줄 수 있을까.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등장한 것은 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눈이 내리는 덕분에 다행히도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그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는 이바노프의 근처로 회색 디지털 무늬 군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도착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내들 얼굴이나 구경하다 가는군.'
이바노프는 멍하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혹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이바노프는 적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딱 열 명이다.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이런 날씨라면 사람 열 명과 개 두 마리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대오를 유지하고 있다. 기초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대형이다. 더군다나 적들과 이바노프의 거리는 이제 무척 가깝다. 한두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병졸 둘 셋과 목숨을 교환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이바노프 같은 특급 공작원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바노프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마침 시커먼 셰퍼드 군견 한 마리가 이바노프가 숨은 구덩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토치카 쪽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괜스레 무덤이나 팠구나. 알아서 파줄 것을.'
이바노프는 짤막한 한숨을 내뱉고 다시 권총을 들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려던 찰나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렸다. 경계 태세를 유지하던 적들의 대오가 흐트러졌다. 굉음의 정체는 스노모빌이었다. 스노모빌에는 높은 지위로 추정되는 자가 타고 있었다. 대오의 인솔자는 스노모빌에 탄 남자에게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이바노프를 바라보던 개는 시끄럽게 짖어대기 시작했지만 병사들의 시선은 이미 인솔자에게 쏠려 있었다.
"제군들 수고가 많다."
알래스카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국 남부 지방의 사투리다.
"아닙니다. 중대장 님."
"지금 제군들이 추적하는 남자는 젊은 여자와 아이들을 잔혹하게 강간하고 죽인 살인마이다. 게다가 냄새 나는 러시아 놈이기도 하지. 지금 모국의 밀항선을 타고 이 범죄자가 도망을 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다. 그는 레드 마피아의 일원으로 탈출 시 환송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바노프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몇달 간 이바노프가 여러 사람을 죽여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죽인 것은 다 남자였고 물론 강간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이바노프는 레드 마피아의 일원도 아니다.
병사들은 지휘관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기습하기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만약 스노모빌을 탈취한다면 목적지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짖던 개의 울음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목줄만 없었다면 이미 이바노프의 토치카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덩치 큰 병사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조용히 해! 중대장 님이 말씀하시잖아."
시간이 없다. 그는 조심스레 쏠 순서를 정했다. 가장 멀리 있는 흑인 병사를 먼저 쏠 생각이었다. 그럼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이바노프의 반대편으로 향할 것이다.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 제 아무리 특수 요원이라 해도 정면으로 자동화기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는 법이니까.
곧 이어 격발이 시작됐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둔해진 이바노프의 후각을 자극했다. 멍하니 서 있는 적들을 쏘는 것은 수천 번도 더 했던 사격장 훈련과 다를 바 없었다. 소음기와 눈보라 소리를 뚫고 일정한 간격의 총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모두 목에 피를 뿜으며 하나 둘씩 쓰러졌다. 스노모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도망을 치려다 총을 맞은 소령과 개 두 마리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을 끝내는 데에는 채 삼십초가 걸리지 않았다. 끝내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어디 있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이바노프는 자신을 엄폐하던 나뭇가지와 흙눈덩이를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스노모빌 근처엔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널부려져 있었다. 새하얀 눈 바닥 위로 시뻘건 피가 가득했다. 죽은 자들의 얼굴 위로 생생한 공포가 보였다.
'이런 제길,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난 이런 데서 죽기 싫단 말이야.'
당장이라도 입 밖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개중엔 꽤 잘생긴 사람도 많았다. 잘 잡힌 건장한 체구는 평소 자기 관리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바노프가 탈취하려던 스노모빌을 위에는 거구의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이바노프는 그 자를 치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다. 엎어져있던 남자는 이바노프의 손이 닿자 갑자기 몸을 돌리며 이바노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비틀거리는 이바노프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었다. 죽은 척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바노프는 반사적으로 발을 뻗어 남자의 손을 걷어찼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고 권총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권총을 잃어버린 남자는 격투 자세를 취했다. 충실히 훈련 받은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세를 보니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그는 왼쪽 어깨에 총을 맞은 상태였다. 남자는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을 마구 휘둘렀지만 부상자의 격투술로는 이바노프를 이길 수 없었다. 이바노프는 순식간에 남자의 팔을 낚아챘고, 그것을 그대로 꺾은 채 남자의 양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남자의 몸에 올라탄 채 경동맥을 눌렀다. 남자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다. 살고 싶다는 간절함과 고통이 얼굴에 가득했지만 정확히 팔초가 지나자 그것도 사라졌다. 결국 남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렸다. 이바노프는 아까 남자의 주먹이 향한 곳을 만졌다. 턱 바로 위의 오른뺨이 얼얼했다. 만약 턱을 맞았다면 죽어 있는 이는 이 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황을 정리한 이바노프는 스노모빌의 시동을 걸었다.
'덴마크제 장난감이로군.'
늘 타오던 러시아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운전에 어려움은 없었다. 곧 이어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스노모빌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남서쪽으로 삼십 마일. 2시간이면 닿을 거리다.
물론 그건 별다른 방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삼십 여분 정도를 달리자 시끄러운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스노모빌의 속도는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르지만 이런 눈보라에도 지워지지 않는 바퀴 자국을 남긴다. 더군다나 소령을 포함해 한 무리의 군인들이 살해당했다. 곧 이어 백미러로 몇 대의 스노모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노모빌에 탄 병사들은 마구 총을 쏘며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베테랑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이었다. 이바노프는 스노우모빌의 수를 세어 보았다.
'세 대?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군.'
처음 이바노프가 수용소를 탈출했을 때 거진 사단 규모의 적이 그를 쫓았다. 하지만 그가 캐나다 국경을 넘는 순간 추격 부대의 규모는 확연히 줄어 들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늘 그가 궁금해 하던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시골 마을까지 여자와 아이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살인마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이바노프의 얼굴이 프린트된 현상수배지가 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를 추격하던 인원들은 지금처럼 소수에 불과했다.
순간 이바노프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의 정치가들은 캐나다 정부에게 이바노프의 정체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캐나다 정부가 자신들보다 한 발 앞서 이바노프를 체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보다 언론 보도가 훨씬 관대한 캐나다 정부는 이바노프가 가진 모든 정보를 발설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진실을 말하는 대신 이바노프를 단순 범죄자라고 왜곡해 정보를 전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캐나다가 아니라 미국 알래스카 아닌가?’
의아해하던 이바노프는 입이 싸고 무식한 걸로 악명 높은 현 알래스카 주지사 캐리 베일리를 떠올렸고 단박에 상황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연방 정부는 캐나다 정부에게 비밀을 말해주지 않은 것과 동일한 이유로 알래스카 주지사에게도 이바노프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그를 추적하는 병력의 양과 질이 형편없어진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알래스카 토박이인 주 방위군 사령관은, 성 범죄자 하나를 잡는데 사단 급 병력을 동원한다는 미 연방 정부의 구상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 들인 것이다. 알래스카의 주 방위군 사령관은 아무리 잔혹한 살인마라고해도 어떻게 일개 범죄자가 분대 규모의 군 병력을 일거에 전멸시켰는지 끝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정리 되자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을 쫓는 이들은 특수 수색대가 아니라 평범한 주 방위군 소속 아마추어들이다. 이바노프는 스노모빌의 핸들을 확 꺾은채로 브레이크를 밟고 그와 동시에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적들과의 거리를 가늠하고 바로 사격 자세를 취했다. 이바노프는 혼자였지만 그의 손에는 아까 탈취한 중화기가 있었을 뿐더러 스노모빌을 엄폐물 하여 안정된 포지션을 취할 수 있었다. 반면 그와 대적하는 햇병아리 군인들은 스노모빌을 탄 불안정한 자세로 사격을 해야만 했다. 이바노프의 사격은 정확했다. 곧 이어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이바노프 쪽으로 오던 스노모빌은 순식간에 조종사를 잃었고, 이내 눈 바닥에 표류하더니 서로 부딪히며 폭발해버렸다.

콰콰쾅.

기계의 잔해와 살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알래스카 인들이 무능한 주지사를 뽑아준 덕분에 이바노프를 따라오는 자들은 더는 없었다. 급격한 긴장 상태가 이완되자 다시 짙은 현기증이 올라왔다. 그는 감기는 눈을 가까스로 뜬 채 시계를 보았다. 이제 한 시간 남았다. 한 시간 뒤에 더치하버 항에 블라디보스토크 행 정기 운항 편이 도착한다. 알래스카와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교역은 뜸했고 배는 자주 다니지 않았다. 이 정기 운항 편을 탑승하지 못하면 보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보름이면 무식한 알래스카 주지사도 적절한 대처를 보여줄지 모른다. 또는 연방 정부가 아끼는 정예 부대가 곧 이곳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 버틸 수 없다. 그 전에 탈출해야 했다.
이바노프는 스노모빌의 속도를 높였다. 30분여 정도를 달리자 눈과 침엽수림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이 마침내 끝나고 현대화된 도시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곧 이어 알래스카 최대의 항구 도시인 더치하버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국식의 건물과 도로가 거리에 끝없이 이어졌다. 도시의 시민들은 이바노프를 흘깃 쳐다봤지만 그 뿐이었다. 이들은 캐나다를 얼어붙게 한 '지독한 범죄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바노프를 보고 살짝 미소를 띠며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마치 살아서 도시에 온 것을 환영이라도 해주듯 말이다.
이바노프의 머리 위로 해가 떴다. 날씨도 기분도 아까에 비해 한결 선선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양 뺨 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로를 따라 앞으로 더 나아가자 멀찍이 도크가 보였다. 이바노프는 스노모빌에서 내려 도크를 살폈다. 빨간색 뱃머리와 선명한 푸른빛 고물이 시야에 잡혔다. 바로 이 배가 이바노프를 러시아로 탈출시켜 줄 것이다.
실상 본 정기 운항 편은 러시아의 대미 공작원들이 다른 국가를 거치지 않고 본토로 귀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행기는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게 되어 있다. 반면 알래스카의 항만은 미국 본토와 비교해 검열이 엄격하지 않다.
이바노프는 부둣가 한 구석 컨테이너로 들어가 배 청소를 하는 작업부 옷으로 갈아입었다. 알래스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정기운항편은 청소 작업부의 인적 사항을 검열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척의 배를 청소하는 다양한 인종의 작업부들은 유독 그 배가 결코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바노프는 그들과 함께 배에 올라가 청소를 시작했고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조그만 사다리를 타고 올라 작은 통로로 향했다.
이바노프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식자재실에 도착했다. 매캐한 기름 냄새와 짠 소금 냄새가 가득했고 쥐와 온갖 벌레시체들이 즐비한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먹을 것과 잘 곳이 있는 장소였다. 통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출항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바닥에 머리를 눕히자 일주일 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낡은 헝겊을 덮자 이내 이바노프는 잠들고 말았다.

사람들은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고 말한다. 실상 역사란 한두 번의 우연적 사건의 결과물이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이 있으며 거스를 수 없는 그 움직임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혹자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 태어나지 않았어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우연에 의해 일어나기도 한다. 이바노프의 마지막 판단이 옳았다면 그 후 세계사를 바꿀 일련의 사건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바노프가 시베리아 정기 운항 편으로 알고 탑승한 배는 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는 화물선이었다. 극도의 피로가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시베리아 정기 운항 편은 이바노프가 화물선에 탑승한 후 정확히 10분 후 항구에 도착했다. 이바노프가 식자재실로 알고 들어간 화물선의 공간은 사실 냉동 창고였다. 그는 그곳에서 깊이 잠들었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신은 삼 개월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우연히 이바노프를 발견한 선원들은 그를 밀입국을 시도하다 죽은 사람으로 판단했고 그의 시신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신원미상자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만약 남아공으로 가는 화물선이 배 고물을 붉은 색으로 칠하지 않았어도, 아니면 이바노프가 그 장소에 10분만 더 늦게 도착했어도, 아니면 감독관이 청소 작업부들의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어도,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그가 그토록 숨기려고 했던, 약혼자와 동료들의 죽음을 무릅쓰고 훔쳐온 그 작은 마이크로필름은 원래 있어야할 곳과 정반대편 땅에서 그의 시신과 함께 묻혀버렸다.
그리고 이 필름의 부재가 세계열강들을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파워게임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개편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 소설] 파워게임 - 서문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