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하나를 피해 다녔다. 그녀에게 혐오감이나 실망감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와 마주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치부를 드러낸 쪽은 그녀인데 왜 내가 먼저 기가 죽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하나가 그렇게 독하고 악질적인 여자애는 아니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도 모른다. 양선생님이 끝까지 아들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처럼.
혜수의 증언 이후 김웅섭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놈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수학 수업을 들었고, 쉬는 시간엔 평소처럼 그만의 유희를 즐겼다. 가끔은 김웅섭이 나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기도 했지만 내가 전만큼 살갑게 대해주지 않자 다시금 예전처럼 자발적 외톨이로 돌아갔다. 덕분에 나는 지난 일 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집중력을 보이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하나의 전화를 받지 않은지도 꽤 됐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가끔 연락이 왔다. 요즘은 왜 통 보이지 않느냐고. 간략하게라도 답을 보낼까 하다가 그냥 씹어버렸다. 학원이 끝나면 뒷문으로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뒷문으로 나오는데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박하나였다.
“박규. 살아있었네?”
당황해서 쭈뼛거리는 나와 달리 하나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하나와 함께 집으로 걸었다. 똥냄새를 풍기는 으깨진 은행열매와 비에 젖은 깨진 보도블럭. 집으로 가는 이 길이 더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거리에 눌어붙은 껌 딱지를 하나하나 세면서 걸었다.
“야 너무 빨라. 같이 가자.”
어깨 너머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녀의 가늘고 따뜻한 팔이 내 오른팔과 얽혀 팔짱을 꼈다. 습한 공기 너머에서 그녀의 향긋한 샴푸냄새가 날아왔다. 그녀의 살갗은 보드랍다. 그러나 전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달착지근한 그녀의 말투도, 은근슬쩍 내 팔뚝을 압박하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조차도, 어딘가 역겨웠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하나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야!”
그제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찌푸린 그녀의 얼굴은 생채기 난 자존심일까? 아마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를 매섭게 쏘아보던 그녀가 말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침묵으로 그녀에게 시위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잘못한 것? 그녀가 내게 잘못한 건 없다. 하나는 나와 친한, 좋은 친구이자 내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상처를 준 건 박하나가 아니라 그녀를 오해한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박하나는 좋은 사람인가? 혜수는?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마음속을 맴돌던 질문을 던졌다.
“넌 뭐냐?”
“뭐?”
“넌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얼마 전에 들었다. 김웅섭을 저렇게 만든 게 바로 너라고 네 초등학교 동창이 그러더라?”
내 말을 들은 박하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지금까지 너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예쁘고, 똑똑하고. 나한테 잘해주고. 근데 넌 내가 알던 그런 애가 아니야. 네가 김웅섭과 오타쿠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던 거, 솔직히 궁금했어. 네가 오타쿠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고. 그런데 넌 그냥 네가 괴롭히던 애들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고 있었을 뿐인 거지?”
“그만해.”
“내가 김웅섭에 대해 물어볼 때 양심의 가책이라도 들었냐? 그래서 그만하라고 윽박지르던 거였어?”
“그만하라고!”
박하나가 소리쳤다. 박하나의 눈은 동그랗고 예쁘다. 그 예쁜 눈가에 눈물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오랜 침묵이 흐르고 결국 먼저 사과한 쪽은 나였다.
“미안해. 내가 널 잘 모르고 있었나봐.”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너 되게 웃긴다.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그래. 나 원래 그런 애야. 이기적이고 남들 괴롭히는 거 좋아해. 내 친구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너만 그걸 몰랐네.”
“.......”
“김웅섭 그 새끼, 네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때 그냥 철없는 어린애였어. 학교 끝나면 학원가고, 주말에는 공부방 가고, 반에서 누구 옆에 누가 앉았는지 따위 줄줄 꿰고 다니는 게 낙이었어. 그래, 그러다 내 맘에 안 드는 애들 있으면 따돌렸다. 나도 그때는 별 생각 없었어. 철없을 때 한 행동이고 그것 때문에 걔가 그렇게까지 병신 될 줄 몰랐어. 졸라 미안하다. 됐냐?”
나는 악다구니 쓰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그녀는 선한 눈을 가진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지금은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당황스러울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눈매에는 어딘지 모르게 표독스러운 기색이 느껴졌고, 분을 참지 못해 떨고 있는 입술은 한없이 차가워보였다. 그녀는 내가 알던 박하나가 아니다. 일그러진 얼굴도, 앙칼지게 뱉어내는 격앙된 목소리도, 그리고 그 모든 형편없는 변명 따위도.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김웅섭과 마찬가지로 내가, 박하나가, 양선생이, 우리 모두가 교만하고 철없는 오덕후들은 아닐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내고, 그것들을 예쁘게 나열해 합리화 하는 게 우리들 아닌가?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인 건 우리 모두 똑같다.
두려워진 나는 도망치듯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박하나가 나를 부른다. 나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숨이 가빠질 무렵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하나는 나와 함께 서있던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날 밤, 나는 김웅섭에 대한 내 보고서에 마지막 주석을 달았다. 처음부터 김웅섭과 같은 삶을 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웅섭은 어린 시절 겪었던 폭력의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건전하게 경쟁하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용기를 상실했을 것이다.
<김웅섭은 왜 저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것이 과연 스스로 택한 길일까?>
나는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 항목 위에 조용히 X표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김웅섭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보고서는 엉망이었다. 처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그동안에 내가 느낀 감정도, 마지막 질문에 대한 결론과 그곳에 이르게 된 과정조차도. 나 스스로 온전히 납득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보고서를 서랍에 처박아 넣고 방학 내내 묵혀두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학년이 되었다. 양선생님은 이번엔 나를 반에서 1등으로 만들어 보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글쎄, 그게 가능할까? 개학 후 첫 수업을 듣고 나오는 길에 나는 양선생님에게 김웅섭에 관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양선생님은 그동안 보고서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게 뭐냐?”
보고서를 받아든 양선생님은 실소를 터뜨렸다.
“뭐야. 너 정말 이걸 완성한 거냐? 너도 참 웃기는 놈이다.”
“선생님께서 부탁하셨잖아요.”
“내가 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이런 걸 쓰다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김웅섭이 내 아들도 아닌데.”
“웅섭이가 양선생님 아들은 아니지만 웅섭이도 누군가의 아들이잖아요. 선생님도 누군가의 아버지이시고요.”
나는 양선생님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기고 교무실을 나왔다.
“허, 그놈 참.”
나를 바라보던 양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나는 알수 있다. 결국 양선생님은 그 보고서를 버리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내가 양선생님을 본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내 수학 점수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려준, 부모님의 말대로라면 고3 때 내 과외를 해주어야 할 양선생님은 며칠 뒤 돌연 학원을 그만두었다. 양선생님이 학원계를 떠났다는 소식은 교육열이 남다른 이 동네 학부모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가 왜 학원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애를 잘못 때려서 고소를 당했다는 둥,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다시 신림동에 들어갔다는 둥. 다만 양선생과 남다른 친분이 있던 최 선생님께 들은 바로, 양선생님은 아들과 함께 긴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둘이서 잠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기로 했다고, 양선생님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표정은 처음 보았노라고 했다.
“양선생님이 다른 애들은 그렇게 잘 가르치면서, 자기 아들은 제법 속을 썩였나 보지?”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가 무심히 말했다.
“그런가 봐요. 들리는 말로는 히키코모리인가, 자기 방 밖으로 나오지 않던 애라고 하던데.”
“그거 참 독특한 놈이네.”
“양선생님이 애들한테 욕심이 많잖아요. 어려서부터 아들 데리고 공부니 운동이니 그렇게 달달 볶았대요. 그러다 엇나간 거지.”
“자기 꿈 버리게 만든 아들이니 욕심이 오죽하겠어? 못다 이룬 자기 꿈 때문에라도 더 그랬겠지. 그러면 안 되는 거긴 하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어디 말처럼 되나?”
아무 것도 못들은 척, 어머니가 깎아주신 과일을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양선생님의 아들이 오덕후가 된 것은 양선생님 탓일 거라고. 자신이 세운 목표에 당당히 도전하고 노력해볼 의지를 처음부터 빼앗아버린 그 무언가는, 분명 양선생님일 거라고 말이다. 김웅섭에게 박하나가 있다면 양선생님 아들에게는 양선생님이 있다. 보고서에도 적었다시피, 그렇게 도식이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나는 내가 쓴 보고서가 양선생님에게 도움이 됐던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새학년이 된 뒤로 한동안 김웅섭을 보지 못했다. 김웅섭은 공교롭게도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던 양선생님이 학원을 그만두자 더 이상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이후로 김웅섭을 만난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장소에서 말이다.
입시전형이 요구하는 봉사활동 점수를 채우기 위해 나는 가끔 동네 요양원에 갔다. 아파트 단지와는 다소 떨어진 우리 동네 뒷산자락엔 치매노인 수발을 드는 요양원이 있었다. 이 동네에서만 15년을 산 나도 모를 만큼 구석진 곳에 버려진 곳이었다.
빛바랜 현판을 달고 있는 낡은 5층 건물은 초입부터 역한 똥오줌 냄새가 났다. 요양원은 상상 이상으로 바빴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나는 식당으로 투입되었다.
“학생! 가만히 서있지만 말고 빨리 가서 설거지 좀 도와줘요.”
아주머니 말씀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갔다. 주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김웅섭이었다. 김웅섭은 곱슬머리 위에 머릿수건을 뒤집어 쓴 채로 분주히 밥을 짓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만큼 김웅섭도 나를 보고 꽤나 놀랐는지, 작은 눈이 흰자위를 보일 만큼 동그래졌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그러게. 너야말로 어쩐 일이냐?”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정신없이 밀려있는 설거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릇을 씻으면서 나는 속으로 이놈도 대학 가려고
봉사활동 하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역시 대학에 관심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설거지를 마치고 난 뒤에는 할아버지 목욕시키는 일에 투입되었다.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몸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봉사자가 부족해 이틀 째 씻지를 못하셨다고 한다. 나는 코를 잡고 싶은 욕구를 겨우 억눌렀다. 치매 걸린 할아버지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내가 맡은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노동자였을 수도 있고, 지식인이었을 수도 있다. 사장님이나 선생님, 혹은 공직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나를 수차례 밀치고 할퀴었다. 욕조에 들어가서는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어째서 선의를 베푸는 나를 적대시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와락 짜증이 났다.
“그만 좀 하세요! 가만히 계시라고요!”
나는 할아버지의 왜소한 어깨를 움켜쥐고 강하게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갓난아기처럼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고 나는 더욱 난처해졌다. 그때 김웅섭이 나타났다. 팔다리를 마구 휘젓던 할아버지는 김웅섭이 다독이자 어느덧 얌전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김웅섭은 멍청히 서있는 나를 옆으로 비켜 세우더니 직접 할아버지의 몸을 씻겼다.
녹초가 된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어깨를 주무르며 커피 믹스를 타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김웅섭은 해가 기울어가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노인네들 되게 잘 씻기더라.”
“노인네가 뭐냐? 어르신이지.”
김웅섭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노을 지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학원에서와는 달리, 김웅섭은 자신의 능숙한 솜씨를 떠벌리지 않았다. 매일 지켜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김웅섭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렇게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와 학원뿐이었구나.’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면들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김웅섭도 밖에서는 꽤 괜찮은 사람일지 모른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멀쩡한 김웅섭’이 기지개를 켤 시간은 짧아지고, ‘부적응자 김웅섭’만이 마치 그의 전부인 양 굳어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그가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다. 나처럼 다른 사람 뒤나 캐고 다닌 적도 없고, 박하나처럼 약한 애들을 괴롭힌 것도 아니고, 양선생님처럼 폭력으로 누군가를 겁박한 적도 없다. 그는 단지 우리와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르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칼을 뒤집어써왔던 거다. 악의를 가진 진짜 악인들이 씌운 칼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김웅섭은 의외로 괜찮은 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웅섭이 말했다.
“얼마 전에 걔 만났어.”
“누구?”
“네 여자 친구.”
“나 여자 친구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웅섭은 나를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하나 말이야. 네 여자 친구 아니야? 걔가 네 얘기를 하길래. 나는 네가 걔랑 사귀는 줄 알았어.”
“박하나가 널 찾아왔다고? 왜?”
“어, 그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뭐 내가 일부러 말 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걔 부탁을 들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박하나가 뭐라고 했는데?”
“나보고 미안하대. 한참 보니까 누군 줄 알겠더라.”
“그래서 넌 뭐라고 했냐?”
“그냥 알았다고 했지 뭐.”
“그래도 걔는, 걔는 네 인생을 완전히 작살 내 놓은 인간이잖아? 네가 정상적으로 못 살고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이나 보고,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져 살고, 돼지처럼 살찌고 공부도 못하는 게 다 걔 때문인데도 그냥 알았다고 했다고?”
“뭐라고?”
김웅섭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째려보았다. 박하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내가 그를 동정하다 졸지에 본심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무슨 소리냐 그게. 감히 나 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너 돌았냐?”
“아, 아니. 물론 방금 했던 말은 농담이었어. 친한 친구끼리 하는 농담. 근데 하나 걔가 어렸을 때 큰 상처를 줬던 건 사실이잖아?”
“상처? 음, 그건 그렇지. 네 말대로 그때 난 어렸으니까, 상처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김웅섭은 멍한 얼굴로 산기슭을 바라보았다. 마치 산허리에 과거의 족적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김웅섭은 손으로 곱슬머리를 긁적거렸다.
“근데 규야. 난 원래부터 애니메이션 좋아했어. 너희가 날 놀리고 괴롭혀서 애니메이션이 좋아진 게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쩐지 김웅섭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김웅섭은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사과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건네고야 말았다.
“너, 혹시 세훈이처럼 되 볼 생각은 없어?”
“그게 누군데?”
“이세훈 말이야. 키 크고 공부도 잘 하는 애 있잖아. 걔도 옛날엔 뚱뚱하고 너처럼 좀...... 4차원이었다고 하던데.”
“하, 내가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냐?”
“다들 그런 사람은 부러워하고 멋있다고 생각하잖아. 자기 힘들었던 과거를 극복했다는 게......”
“난 애니메이션도 좋고 피규어도 좋아. 그게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라면 난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 그래, 솔직히 내가 백프로 쿨하다는 거짓말은 관두겠어. 나도 가끔은 연애 하고 싶고 공부도 잘하고 싶다. 근데, 세상에는 남들 시선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많아. 박하나든 심민경이든, 내가 알게 뭐야?”
김웅섭의 말을 들은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물론 나 같은 속물이 김웅섭의 논리에 설득될 리 없다. 내가 보기에 김웅섭의 가치관은 여전히 근시안적이고 위태로운 모래성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문제 삼고 싶었던 건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그가 추구하는 천진난만한 미래는, 단지 소방차가 멋지기 때문에 소방관이 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다를 게 없다.
나는 그에게 몇 마디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요양원에서 김웅섭의 신세를 져야 했던 내가 그의 인생과 가치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옳지 못한 일인 듯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차에 오르는 나를 김웅섭이 불러 세웠다.
“규야.”
그는 뒤를 돌아본 내게 말했다.
“다른 사람 인생 함부로 동정하지 마. 그건 욕을 하거나 때리는 것보다 훨씬 잔인한 일이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김웅섭의 모습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이 할아버지를 씻기던 모습을 떠올렸다. 세상에 스스로 등을 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등을 밀 땐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김웅섭을 너무 얕잡아보고 윽박지르기만 했던 건 아닐까? 어차피 다 함께 부대껴야 할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눈을 뜨니 갑자기 나를 둘러싼 우주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크게만 느껴졌다.
버스가 느릿느릿 출발했다. 차창 밖의 김웅섭이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울적해진 나는 고개를 떨어뜨려 발끝을 보았다. 멍청한 건 나였다. 나도, 박하나도, 양선생님도, 모두들 교만하고 어리석은 오덕후들이다. 자기만의 관점에 매몰되어 함부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댔던 건 우리 모두 똑같다. 결국 김웅섭도 신인류가 아니었던 셈이다. 노을이 집으로 가는 길을 빨갛게 달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