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고 찾아간 음식점 요리가 의외로 괜찮다. 단점도 있다만 어딘가 참신하고 성장가능성도 보여서, 나중에는 정말 근사한 맛집이 될 것 같다. 근데 손님이 별로 없이 가만두면 제대로 감을 잡기 전 영업을 중단해버릴 것 같다. 영화 <툼레이더> 얘기다.
나는 영화 <툼레이더>를 무척이나 재밌게 봤다. 그러나 댓글이나 평점을 보면 반응이 시들한 편이다.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문 닫을 음식점을 홍보하는 맛집 탐방객의 심정으로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본다. 물론 내가 이 영화 리뷰를 써서 몇 명이 더 본다고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30년 전 인디아나 존스와 툼 레이더
어린 시절 본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는 비서구권을 비하하는 온갖 장면이 다 나왔다. 원숭이 뇌를 씹어먹고, 눈깔 수프와 벌레구이가 등장하며 이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야만스레 묘사한다. 똑똑한 백인 남성 고고학자는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힌트로 세계 각지의 전설과 신화를 활용하고, 이를 제지하려는 악독한 비백인 악당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실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수없이 패러디된 바로 그 장면. 아랍 사람 입장에서 보면 분명 불쾌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나 존스>가 재밌었던 것은, 영화를 보면 마치 내가 미지의 나라를 모험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막이나 정글의 유적지에서 이국적인 건축물과 악당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활극을 보았을 때의 여운이란 실로 대단했다. 솔직히 액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볼거리 아닐까. 영화 < 300 >은 페르시아의 왕을 아프리카의 토인 추장처럼 그려놓고, 실제로는 피지배층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었던 스파르타를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마냥 묘사했다. 그러나 진중권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기꺼이 그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나마 2000년대에는 <미이라> 시리즈가 있었다. 앞선 영화 <툼레이더>(2001)는 안젤리나 졸리가 게임 속 라라 크로프트와 매우 흡사하다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60이 훨씬 넘은 해리슨 포드가 분한 <인디아나 존스5>는 예전의 그 힘이 없었다.
이국적인 모험영화 대신,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물이 그 자리를 채웠다. 물론 히어로물 영화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인디아나 존스>를 보며 느낀 재미를 다시 느껴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 <툼레이더>가 리부트 돼 개봉한 것을 무척이나 반갑게 생각하는 이유다. 특히 이 영화가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여자 주인공 액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다
단정적으로 말해 여성은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다. 올림픽에서 남성과 여성의 기록은 성인 남성과 남자 청소년 간 기록보다 훨씬 크게 차이가 나고, 일반 남성보다 월등한 장미란이라고 해도 비슷한 체격의 남자 역도 선수에 비하면 감당할 수 있는 중량은 크게 떨어진다. 이건 문화적 젠더가 아니라 생물학적 섹스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 간의 신체적 능력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성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 배우만큼 화끈한 액션을 구사하기 어려운 여자 배우들이 액션을 보여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겉만 액션이고 실은 섹스 어필을 하는 것이다. 섹시한 여자 주인공은 실제 싸움에서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가슴이나 늘씬한 다리를 보여주며 남성들을 제압한다. 두번째는 <지 아이 제인>에서 데미 무어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 주인공이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큰 근육을 키워 마치 남자 같은 액션을 보여주는 것이다.
첫번째는, 겉만 액션이고 실은 섹스 어필을 하는 것이다. 섹시한 여자 주인공은 실제 싸움에서 실용성과는 무관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바스트 모핑이나 늘씬한 다리를 보여주며 남성들을 제압한다. 두번째는 G.I. Jane에서 데미 무어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 주인공이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큰 근육을 키워 마치 남자 같은 액션을 보여주는 것이다.
첫번째의 경우 액션이라기보다 남성 관객들을 타깃으로 한 성 상품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고, 두번째의 경우 전문 여성 보디빌더들조차도 남성 호르몬을 맞는 실제 현실을 고려하면 어차피 건장한 남성이 하는 액션만큼 화끈하기 어렵다.
굳이 액션영화의 기준이 남성이 될 필요는 없다. 피겨 스케이터 아사다 마오가 주목 받았던 것은 여성 피겨 스케이터로서는 드물게 '트리플 악셀'을 시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여성 피겨 스케이터들이 소화하기 매우 어렵다. 그 김연아조차도 하지 못했으니까. 반면 남자 스케이터들은 다리 근력의 힘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트리플 악셀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자 선수들의 피겨 스케이팅이 남자 선수들의 피겨 스케이팅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못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는 남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연함과 같은 강점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툼 레이더>는 종전과 달리 여성 신체의 강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남성 액션과는 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종합격투기를 관람하건나 수련하는 인원들이 많아진 21세기의 높아진 관객들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장면이 여럿 보인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성 상품화 논란이 일어날 만큼 육감적인 몸매를 보여주거나 억지스런 근육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이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인 주짓수나 레슬링의 기술을 사용했고 여성의 신체에 더 최적화된 무기를 활용해 액션을 이끌어낸다.
여군들이 가장 많이 동원되었고 이들의 전투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던 독소 전쟁에서, 여군들은 침착함과 빠른 판단력이 요구되는 스나이핑 분야에서 남성들을 압도하는 성과를 보여주곤 했다. 거친 섬이라는 환경에서 재빠른 판단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해 건장한 남성을 제압하는 장면은 실로 흥미진진하다. 아마 앞으로 여자 주인공의 액션물은 이 같은 형태를 띄지 않을까 싶다.
비백인계 남성의 비중 증대 및 역활 다변화
이 영화에서 동양계 배우인 오언조가 분한 루 렌은 사실상 남자 주인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동양인 남성이란 신비롭고 과묵한 무술가 또는 잔혹한 악당으로 주로 등장해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된다. 이에 반해 오언조의 루 렌은 전통적으로 백인 남성이 맡던 역할을 담당한다. 첫 등장은 물론이고 영화 내내 건장하게 잘 그을린 그의 몸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함께 매우 섹시하게 묘사되며, 명석함이나 익살스러움 역시도 조연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도 시대상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30년 전 인디아나 존스2에서 인디아나 존스의 오랜 친구인 동양인 남성은 인디아나 존스를 탈출시키고 대신 총을 맞고 죽지만, 라라 크로프트를 탈출시킨 루 렌은 끝까지 살아남는다(특히 악당들이 라라 크로프트를 탈출시킨 루 렌을 살려두는 것은 거의 개연성을 팔아먹은 수준이다.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감독은 이 배우와 배역을 끝까지 살렸다)
이것도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 6대 007인 다니엘 크레이그는 007의 속편에 출연할 바엔 차라리 손목을 긋고 말겠노라는 과격한 언사를 남긴 바 있다. 그래서 한동안 누가 7대 007이 될 것인가에 대한 가십기사가 쏟아졌는데........ 많은 언론은 아프리카계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를 꼽았다. 흑인 남성이 007로 하마평에 거론될 수 있는 것은 전 세기라면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도 이드리스 엘바가 7대 007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체적으로 강건하면서도 어딘가 우아하고 지적인 분위기가 풍겨야 하는 007 배역에, 현재로서 이드리스 엘바보다 더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였는지 결국 이드리스 엘바는 7대 007로 선정되지 않았다.
백인 남성 관객이 주 타깃이 할리웃 영화에서 백인 여성과 비백인 남성 간 키스나 섹스 장면이 나오는 것은 중요한 금기로 꼽힌다. 사실상 <툼 레이더, 2018>의 남주인공이나 다름 없으며, 극의 전개를 보아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키스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루 렌과 라라 크로프트는 결국 포옹만을 할 뿐 키스하지 않는다. 시대상의 변화가 감지되나 또한 여전한 한계를 함께 보는 것도 <툼 레이더, 2018>을 감상하는 묘미다.
여전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또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나. 지금 10대나 20대 초반 여성들의 성에 대한 인식이 내 세대와 또 다른 것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녀 간 정사를 보는 관점 역시도 달라질 것으로 예측한다.
<툼 레이더>의 루 렌은 주인공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인공에게 조력한다는 점에서, 제임스 본드의 본드걸과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전 세계의 무덤을 탐험하는 라라 크로프트를 조력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 각 나라 별 섹시하고 지적인 남성들을 등장시키는 것('라라보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다)도 재밌지 않을까 생각해본다(그게 뭐 어때서?).
후속작을 기대하며
이야기 자체도 상당히 짜임새있다. 얼핏 미스테리로 보이는 고대 여왕의 신화의 현실적인 실체를 제공하는 것, 각 장면의 퀴즈에서 관객들에게 그 퀴즈를 풀 시간을 충분히 부여하는 것도 매우 즐거웠다(내 자랑이다만 난 라라 크로프트보가 답을 말하기 전 전부다 먼저 풀었다).
부유한 크로프트 집안의 영리한 여성 고고학자. 어떤 점에서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도, 인디아나 존스도, 소화해낼 수 있는 실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당초 그 시작은 게임이었지만 라라 크로프트라는 이 이름은 당당하고 지적인 여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이미 남녀노소를 가지지 않고 수많은 팬을 확보한 상태다.
완전 수작이었다 보기는 어려웠고 진부한 구석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신한 시도가 많았고 이런 영화가 잘 안 나오는 지금, 좀 더 이 영화 시리즈를 관람해 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