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소설] 파워게임 1부 - 동토(凍土)의 밀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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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5 월 15 일
러시아 모스크바

모스크바의 봄은 따뜻하다. 화창한 5월의 햇살이 겨울 내내 움츠려 있던 시내 곳곳을 선선히 비추고 있었다. 먼 남쪽 이란의 목화밭에서 올라온 따스한 바람이 카스피 해 (海)와 볼가 강을 거쳐 이곳 모스크바까지 포근함을 선사했다.
초저녁임에도 시내 곳곳은 봄날을 즐기고자 거리로 나온 사람들로 분주했다. 시가지의 유명한 노천카페엔 손님들이 가득했고 거리에는 흥겨운 중앙아시아의 전통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스메타나 소스가 듬뿍 발라진 우크라이나 식 고기꼬치를 든 채 흐뭇한 표정으로 이를 관람했다. 전 세계적인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모스크바는 여전히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다소 무질서하지만 아름다운 모스크바의 도로 위로 3대의 검은 리무진이 나타났다. 벼락부자가 된 사업가부터 마피아 보스까지, 경호원을 대동한 채 고급 차량을 타고 시가를 지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헤드 라이터 위로 선명한 러시아의 깃발이 달린 두 번째 리무진에 탑승한 인물은 결코 그런 부류의 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구소련 시절이라면 한마디 말로 서방국가들의 군비를 좌지우지 했을 인물로, 현 러시아 해군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네예프스키 원수였다.
환갑이 훨씬 넘은 백발의 노원수지만 인상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았다. 세월의 대부분을 군함에서 보낸 바다 사나이답게 짠 바람에 익은 붉은 얼굴이 강렬 했다. 검은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은 백발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원수로서의 위엄을 더해주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군인으로 운명 지워진 듯 갈색 군복이 매우 잘 어울렸다.
그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갑작스런 대통령의 소환으로 3000 Km 이상 떨어진 군항(軍港)에서 여기까지 부랴부랴 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침 3주간 함대 시찰이 끝나고 몇 일간의 휴식이 예정되어 있던 참이었다. 최근 신형 잠수함의 개발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국제 정세에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이런 시점에 핫라인이라니. 애국심 깊은 대장의 얼굴에도 짜증이 어렸다.
웅장한 메인 스타디움은 오늘 있을 유명한 록 가수의 공연을 기다리는 관중들로 북적거렸다. 네예프스키 원수는 이런 소란스러운 인파가 싫었다. 문득 차가운 바닷바람 앞에 우뚝 서있을 군함이 그리워졌다. 기름 냄새가 퀴퀴한 이 강철덩어리는 언제나 적당한 무료함과 휴식을 제공해 주었다. 더구나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에는 리무진의 고급 가죽시트나 딱딱한 선상침대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리무진은 붉은 광장의 인파를 헤치며 크렘린 궁으로 향했다. 동서양의 양식이 절묘하게 섞인 크렘린 궁은 황금으로 치장된 높은 첨탑과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들에게 마치 동화 속 마법의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극적인 유혈 사태와 공포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세계를 지배했던 위대한 크렘린은 다시금 강건해진 러시아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대통령궁의 경비병들은 특유의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했다. 차에서 내린 네예프스키 원수는 기립해 있는 경비병들을 지나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로비를 지나 대통령 실 앞에 설 때까지 그에게는 아무런 긴장감이나 기대도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원수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비서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명의 덩치 큰 경호원들이 몸수색을 하는 사이 비서관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 제꼈다. 중세 기사들의 갑옷이며 그리스 정교의 유물들로 장식된 집무실은 마치 작은 박물관 같았다. 제정 러시아 풍의 고색창연한 가구들과 헤라클레스 신을 그린 천장의 벽화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대통령은 단신의 사내와 함께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를 보고 있었다. 보로딘 대통령은 여전히 건장했고 힘이 넘쳐 보였다. 건장한 어깨와 곧게 뻗은 굵은 목 위로 차갑고 작은 얼굴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잘 잡힌 수트 위로 넓은 어깨와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나 남자다운 인상을 더해주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한 보로딘 대통령의 인기와 지도력은 정점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원수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의 큰 덩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단신의 사나이였다.
"오랜만이군요. 네예프스키 원수님. 긴 여행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나이가 들었는지 전용기도 편치는 않더군요."
네예프스키 원수는 자리를 권하는 단신의 머리가 벗겨진 사나이는 알렉세이 바사예프로 현 SVR(러시아 해외정보국)의 국장이었다. 그는 눈 사이가 좁고 슬라브인답지 않게 광대가 툭 튀어나온 볼품없는 얼굴의 소유자로, 비쿠냐와 캐시미어가 섞인 고급 정장 위에 명품 서스팬더를 걸치고 있었지만 작고 굽은 체형으로 인해 좀처럼 폼이 나지 않았다.
그를 응시한 네예프스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원수는 바사예프 국장과 해외정보국을 혐오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군사정보와 기술의 유출을 막는다는 핑계로 많은 군 인사들을 좌천시킨 바 있다. 크고 작은 사건들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불명예제대를 했던 동료 장성들을 생각하니 원수는 형식적인 웃음조차도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바사예프 국장은 마냥 싱글벙글 이었다.
"저녁식사는 하셨습니까? 만찬이 준비되어 있어 원하신다면……."
네예프스키 원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대통령과 국장이 들여다보던 지도를 바라보았다. 사할린과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일본까지 그려진 수장의 지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군사지도에는 극동함대의 핵 잠수함 위치나 갓 배치된 미공개 신형 무기 내역과 같은 일급 정보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해상 자위대와 미 태평양함대를 비롯해 동해에서 작전 전개가 가능한 모든 국가의 군사정보가 빼곡히 지도를 매우고 있었다.
네예프스키 원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해군 총사령관인 자신을 거치지 않고 군사 기밀들이 이처럼 해외정보부로 쉽게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각하, 이건 대체 뭡니까?"
다소 무례했으나 원수는 개의치 않았다. 냉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러시아의 국가 이미지가 쇄신되고 경기가 부흥하고 있는 현 시점에, 군부도 아닌 해외정보국이 군사 기밀을 바탕으로 뭔가를 획책한다니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예프스키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국장을 노려보았다. 만약 대통령이 없었다면 바로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네예프스키 원수 동지. 화를 내는 것은 내 설명을 들은 뒤에라도 늦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국장을 무섭게 쳐다볼 필요는 없으니까. 자 일단 자리에라도 앉으세요."
보로딘 대통령은 씽긋 웃으며 원수에게 자리를 권하였으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하. 최근 해외정보국의 대외공작은 국영언론에서조차 비방할 만큼 빈번하고 대담했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각하께서 직접 진두지휘 하시는 줄은 몰랐군요."
"원수 동무 일단 진정하세요. 통수권자로서 원수를 부른 것은 사안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죠."
온화한 말 속에 묘한 차가움이 서려있었다. 네예프스키는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보로딘 대통령은 차분한 표정으로 원수를 응시하며 물었다.
"우선은 내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러시아 극동함대가 일본 해상 자위대와 일전을 벌인다면 이길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각하 "
원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가 아는 러시아 군은 여전히 강건하다.
"그렇다면 미 7 함대는 어떨까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해라면 문제없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날아오는 수호이와 미사일의 지원을 염두에 둔 답변이었다. 하지만 네예프스키는 유사 시 방금 말한 주일미군과 일본 해상 자위대가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북방의 위협에 대비해 수많은 훈련을 해 온 하나의 팀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러시아의 승산은 결코 높지 않다. 그것은 대통령도 이미 잘 알고 있는 공지의 사실이다. 왜 그것을 묻는 것일까? 네예프스키 원수는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혹시 극동에서 미일동맹에 견줄만한 동맹국을 찾을 수는 있을까요?"
원수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좋지 않았다. 냉전기에는 미국보다 중국이 더 위협이 된 시기마저 있었다. 최근 대외적인 우호 관계를 과시하고 있었으나 세세한 부분에서 양국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일치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북한이다. 그러나 갑판에서 신들린 듯한 손놀림으로 구식 기관포를 장전하는 북한 해군병사를 떠올리자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해전이라면 북한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다에선 이지스 순양함에 대한 북한병사들의 우스꽝스러운 자폭 공격이 감행될 것이고 김정은은 립 서비스 차원에서 핵미사일 발사를 운운하며 식량 원조를 요구할 것이다. 네예프스키 원수는 무미건조하게 답변했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보로딘 대통령은 그런 네예프스키 원수를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원수는 그런 대통령의 표정이 어쩐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하지만……. 뭐 여차하면 우리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지. 원수 동지! 북해, 발틱, 흑해 이 3개 함대의 핵심전력을 동해로 당장 급파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각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냉전은 삼십년 전에 끝났습니다!"
네예프스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붉은 얼굴이 더욱 시뻘게져 있었다.
"북해함대는 커녕 극동함대가 조금만 움직여도 당장 전 세계 위성 망에 잡힙니다. 우리 러시아군을 시대착오적 사고를 가진 망신거리로 전락시킬 생각이십니까? 게다가 만약 러시아 해군이 동해에서 정말 작전을 전개한다면, 그저 망신거리로 끝나지만은 않을 겁니다."
보로딘 대통령은 그런 네예프스키와 대조되는 극히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원수 동지, 지금 이 사안은 지나간 시대에 취했을 법한 무모한 군사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대통령인 내가 장담하지요. 일단 내 질문에 답해줬으면 좋겠군요."
네예프스키는 화를 겨우 억누른 채 말했다 .
"우리 러시아는 정기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륙훈련 및 기동훈련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중국과 합동훈련을 진행한 바 있으며 작년 훈련 시에는 항모 쿠투조프를 비롯한 북해함대의 핵심전력 다수가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조금 더 규모가 큰 훈련으로 위장한다면 3개 함대의 핵심전력을 극동으로 보내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역시 해군 원수시군요."
보로딘 대통령은 원수의 답변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멀뚱 앉아있던 바사예프 국장에게 턱짓을 했다.
"원수 동지. 아까 각하께 해외정보부가 무모한 공작을 하려 한다며 소리를 높이셨지만 그건 좀 섭섭한 말입니다. 저희는 사소한 정보 몇 가지를 가지고 쓸데없는 공작질이나 하는 그런 집단이 아닙니다. 원수 동지처럼 저희도 국가의 방위를 위해 불철주야 뛰는 사람들이지요."
작달막한 키의 그는 말을 잠깐 끊더니 마음이 상했다는 듯 오므린 입을 쑤욱 내밀었다. 네예프스키는 바사예프 국장의 표정에 억눌렸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입을 꽉 깨물었다.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원수 동지를 이렇게 부른 것은 러시아 대외정보국에서 수집한 정보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 국립 모스크바 대학의 지질 연구원에서 보고해온 내용 때문이지요. 일단 읽어보시지요."
‘물리학이나 원자학도 아니고 지질 연구원이라고?’
네예프스키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 개 자식이 또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려고 하고 있군.’
바사예프 국장은 품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그 사이에 끼워진 얇은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국장은 정중하게 이 보고서를 원수에게 건내려 했으나 네예프스키는 그것을 확 낚아채 버렸다. 네예프스키는 국장을 무섭게 노려본 뒤 비웃는 표정을 띠며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딴 게 다……."
네예프스키는 막 욕을 쏟아 부을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보고서의 첫 장을 보자 그만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피로와 분노는 싹 사라졌다. 대통령이 자신을 갑작스레 호출한 이유도, 북해함대 동원에 대한 대통령의 의아한 질문도 이제 모두 이해가 되었다. 원수의 반응을 본 바사예프 국장이 만족스러운 듯 손을 비비며 다시 말을 걸었지만 네예프스키는 보고서의 내용을 읽는 데에 정신이 팔려 국장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보로딘 대통령이 육중한 음성으로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비로소 원수는 보고서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원수 동지, 당신이 틀렸소. 냉전은 끝나지 않았어. 이제 곧 시작이지. 그리고 이번엔 우리가 이길 것이오. 그 승리에 있어 방금 본 보고서의 내용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 러시아의 300년 숙원 성취가 눈앞에 있소. 몇 달 뒤 우리는 동북아의 질서를 재편 하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 태평양의 맹주가 될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우리 러시아의 국운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태평양의 맹주!

그 말이 원수의 가슴을 젊은 사관생도 시절마냥 뛰게 만들었다. 구소련 시절 그가 가졌던 강대한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그렇다, 이 일은 국운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위험한 모험이지만 분명한 승산이 있다. 세차게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원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각하, 아직까지 이 정보를 알고 있는 다른 나라는 없습니까?"
"원수 동지. 우리는 지질학 연구 수준은 미국과 비교해도 2년 정도는 앞서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부분적인 가설을 제시할 수 있는 수는 있겠지만 우리처럼 구체적인 시간을 예측해 미리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여기 바사예프 국장이 지휘하는 해외정보부가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아무런 이상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군사적 행동 역시 취하고 있지 않음을 확인했습니다."
바사예프 국장이 말을 이었다.
"네예프스키 원수 동지, 우리 해외정보부는 이 작전의 효율적인 전개를 위해 내일 서울로 믿을만한 다수의 요원들을 파견할 생각입니다. 이미 그쪽의 인물들도 적당히 포섭해놓은 상태입니다. 이제는 군이 움직여야 할 차례입니다. 요컨대 이 작전은 러시아 군과 정보부가 쌍두마차가 되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거죠."
말이 끝나자 바사예프 국장은 특유의 경박한 미소를 지으며 원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여전히 역겨운 얼굴이었으나 조국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열이 그 혐오감을 억눌렀다. 애국심 깊은 원수는 씩 미소를 지은 후 국장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보로딘 대통령이 원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원수를 응시하는 시선에는 기대와 신뢰가 가득했다. 원수는 악수를 청한 손을 꽉 잡으며 대통령과 가볍게 포옹했다. 원수와 대통령 모두 서로의 가슴에 있는 흥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 네예프스키 원수는 군 전용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갔다. 원수의 경호원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피곤에 절어 짜증 섞인 표정을 짓던 그가 이른 시간임에도 활기 넘친 표정으로 경호원들을 독려하며 비행기에 승선하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한편 모스크바 공항에서는 한국과 러시아의 기업 문화 교류 행사로 유명 기업인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국영 러시아 항공 아에로 플롯에 탑승했다. 연례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탑승 인사들의 명단이 조금 달랐다.
보로딘 대통령은 기자 회견을 열고 최근 미일 합동훈련이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며 미국과 일본을 비난했다. 또한 그들의 군사협력 체계에 대비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에서 항공모함을 동반한 대대적인 수상훈련 및 상륙 훈련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1달 뒤 Kuznetsov 급 항공모함을 비롯한 키로프 급 순양함 6 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세계 주요국의 언론사들은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러시아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는 것으로는 판단하지는 않았다. 단지 최근 부쩍 발언 수위가 세진 보로딘이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만 보았다.
그리고 어느 국가의 정보기관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앞 바다에는 알래스카 베링해협과 러시아의 북해, 흑해, 발틱해 함대에서 파견된 핵잠수함들이 득실거렸다. 중국과 중동 문제에 정신이 팔린 미국은 러시아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 러시아의 따뜻한 날씨는 많이 남은 터였다. 보로딘 대통령은 흑해의 대통령 별장에서 아제르바이잔 산 캐비어를 음미하며 햇살을 만끽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1 달간 체류할 예정이었다. 대통령은 이 별장이 보기 드물게 멋진 장소이며,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전쟁 소설] 파워게임 1부 - 동토(凍土)의 밀의 (1)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