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이 불편해 보이시는 할머니가 지하철에 탑승하셨습니다. 제가 타고 있던 차의 노약자석은 만원이었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꽤 많았기에 잘 앉으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던 빈 좌석들을 쑥 둘러보시고도 다음 차로 넘어가시곤 비좁은 노약자석에 앉으셨습니다.
정말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들의 눈치가 거슬리셨던 건지, 젊은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남겨두려 하신건지, 아니면 순전히 노약자석이 편해서 그러셨던 건지 저로서는 알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음에도 다른 사람의 자리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그 마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처음으로는 제가 느꼈던 그 당혹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묘하게 슬프고 궁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하면서 숨통이 트이던 이 마음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여기서 잃어가는 인간의 진정성 혹은 존엄성과 같은 무엇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그 행동은 모범적인 시민상을 답습하며 윤리적 우월을 표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 지하철 내에서의 모호한 관습과 규율을 따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빈자리가 넉넉했기에 옆 칸의 빈 노약자석을 두고 다른 자리에 앉는 것이 혹여나 이기적인 사람이라 할지언정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시 말하면 그 할머니는 자신의 희생적 행위가 자신과 상대방의 윤리적 가치를 판가름하는 기제로 역할하지 않는 환경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했을 편안함을 두고 불편함을 택한 것이었죠. 이는 다음 칸으로 넘어가 비좁은 노약자석에 앉을 때 들어가는 불편함의 양적 크기와 무관하게 순전히 타인의 고려가 행동의 기저에 자리 잡혀 있을 때 나오는 행동인 것이죠.
자신의 취향과 상대방을 대할 때 드러나는 기호적 행위들마저 자신의 가치관을 드높이거나 방어하는 지평선에서 작동되는 요즘에 이 할머니의 행동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들에 벗어나 남을 위해 자신의 불편함을 고려할 수 있는 인간의 진정성 그리고 존엄성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와 타자의 ‘나’로 단절되고 고립된 형태로 이어지고 생산되는 대부분의 행동양식 속에 ‘너’ 혹은 ‘우리’라는 공동선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고독한 할머니의 모습이 슬펐고 또 모양새가 궁색했으며 동시에 따뜻하고 숨통이 트였습니다.
저는 제목에서 이 할머니의 행동에서 엿보는 예술이라 밝혔습니다. 예술의 뜻과 정의는 시대에 따라 가변적인 성격을 보여주었으나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고 진실된 초상을 그린다는 궁긍적 지향에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따라서 할머니가 했던 행동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