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리 먹고 침대에서 뒹구는데 한 프레이즈가 문득 떠올랐다. 짧은 멜로디지만 손으로 악보를 그리고, 직접 쳐보고 싶었는데 키보드는 아직 공연장에 있다. 보면대만 남은 방 한쪽이 휑해 보였다. 피아노도 없는데 손으로 악보를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오랜만에 컴퓨터로 찍어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멜로디는 도시도레미레미파솔↗솔↘이었는데, 너무 흔한 것 같아 파에 #을 붙였다. 도시도레미레미파솔↗솔↘은 다장조(C Key)고, 도시도레미레미파#솔↗솔↘은 사장조(G Key)다. 이걸 사장조로 보기 시작한다면 도시도레미레미파#솔↗솔↘이 아니라 파미파솔라솔라시도↗도↘가 된다. 음 하나가 야기시키는 큰 변화가 새삼 놀랍다.
굳이 따지면 사장조지만 사장조로 그리고 싶진 않아 다장조로 악보를 그렸다. 그럼 도시도레미레미파#솔↗솔↘이 된다. 무슨 스케일을 써야 할지 고민해본다. C Lydian을 써야 할까?
근 몇 년간은 프로그램으로 악보를 만들 일이 많았는데, 스팀잇을 시작하면서 손 악보를 더 많이 그리게 됐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차이인 것 같다. 예전엔 해야 하기에 싫은 것들이 참 많았다. 요즘은 해야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즐기려 한다. 둘 다 하고 싶은 일로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연습을 가야 하는데 계속 멍하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연습 거리를 정하는 게 우선인 것 같은데, 연습실에 갈 때 어느 카페에서 어떤 커피를 사 갈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요즘은 스타벅스 바닐라 더블샷에 빠져있다. 우유를 싫어해 라떼도 먹지 않는데, 우유가 적게 들어간 커피를 요즘에서야 맛보게 되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런 걸 먹다 보니 요즘은 아메리카노가 입에도 안 들어온다.
키우던 바질 트리가 죽었다. 물만 잘 주면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바쁜 와중에도 물은 꼬박꼬박 주었는데,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모두 시들어버렸다. 실은 물은 주었는데, 마음을 주지 못했다. 식물도 마음을 아는 걸까?
바질 트리가 죽고 나서야 가지치기를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줄기를 자르는 게 아플 것 같아 따로 먹지도, 자르지도 않았다. 이런 사랑의 방식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는 종종 애정이란 명목하에 무언가를 방치하곤 했다. 끝없이 자라 내 방을 가득 채울 줄 알았던 바질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요즘은 작업일지를, 연습일지를 쓸 수 없다. 늘 그랬듯 나의 얕은 애정으로, 아프지 않길 바란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방치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모두 너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에선 이런 대화가 나온다.
"안 돼, 이름은 안 돼. 그건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돼"
"그래. 네가 좋을 대로 해""내가 그에게서 간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거야. 내 마음속으로 말이야.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날 위해서 이름만은 안 돼. 그걸 말할 수는 없어"
요즘 난 이곳에서, 이름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것도 같다.
얼마 전 스타벅스에서 생일 쿠폰이 발급됐다. 저번 생일 쿠폰은 쓰지도 못하고 기한을 넘겨버렸다. 내일은 맛있는 프라푸치노를 먹어야겠다. 휘핑을 있는 대로 올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