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날이 되니 글감이 고갈된다. 아니, 쓸 말은 많지만 쓸 힘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음악 얘기를 해보기로. 작곡가가 들려주는 쉬운 음악 이야기로 음감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고 싶었지만 복잡한 내용을 쉽게 다룰 자신이 없어서 잠깐 미뤄두고 수기로 대체한다.
나는 음악을 하면서도 음감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고, 음감이 왜 필요한지도 몰랐다. 음감에 대한 중요성과 절대음감에 대해 처음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됐던 때는 대학 입학 직후였다. OT 장기자랑을 준비하는데 선배가 절대음감인 사람이 있냐고 했고, 'C(도)' 음을 내달라고 했다. 내가 냈던 'C(도)'음은 절대음감인 친구가 낸 'C(도)' 음과 달랐고, 그때 충격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까지 들어가 놓고도 음감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학교 수업 중 시창-청음 과목이 있었다. 작곡 파트만 모여서 수업을 들었는데 작곡 전공 중 절대음감의 비율이 꽤 높았다. 그 당시 나와 같이 다니던 친구는 4성(동시에 음 4개)까지는 거뜬히 듣는 절대음감이었으므로 나는 상대적 쭈구리가 되면서, 그때부터 열렬히 절대음감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 참고로 절대음감도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단선율만 듣는 사람, 7성(동시에 음 7개)도 듣는 사람, 단선율은 듣지만 코드는 못 듣는 사람 등등. TV에서 나올 법한, 복잡한 음악을 듣고 그 자리에서 똑같이 연주하는 사람은 살면서 두 명 밖에 못 봤다.)
그 당시 내 음감 수준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웬만한 팝, 가요 곡을 카피할 정도는 됐고, 어렵지 않은 단선율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단선율도 '도레미파솔라시도' 스케일 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지, 스케일을 벗어나는 음도 들을 수 있는지에 따라 실력이 나뉜다. 오래돼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처음 청음을 했던 날의 기억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상대음감)
청음 수업에서는 단선율도 들었다가, 코드 진행도 들었다가, 코드 퀄리티(성격)도 들었다가 했다. 생각보다 나는 코드 진행 청음에 강했고, 코드의 성격을 듣는 것은 젬병이었다. 코드 진행을 잘 들었던 것은 귀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음에 올 코드를 화성학적으로 인지하고 추리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드 성격을 듣는 청음은 이런 식이다. 코드의 중심음(Root, 근음)은 듣지 않지만 이 코드가 Dominant 7th Chord인지, Major Triad인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나는 Major 7th Chord와 Dominant 7th Chord를 특히 구분하지 못했고, 함께 다녔던 동기와 틈만 나면 강의실에 들어가 저 두 개의 코드 청음을 연습했다. (늘 마무리는 "언니 그게 왜 안 들려?" 였다. ㅠㅠ)
청음에 대해 인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과도할 만큼 절대음감에 대해 집착하곤 했다. 주위에 절대음감이 너무 많기도 했고, 내가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은 모두 절대음감이었기 때문이다.
청음에 대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한 가지 일화는 4개 코드가 반복되는 간단한 가요를 학교 운동장을 돌면서 들었던 것이다. 2시간가량을 운동장을 뱅뱅 돌며 그 코드가 무엇일지 집중해서 유추했다. 집에 돌아와 바로 정답을 확인해봤지만 터무니없는 코드들이었다. 조성도, 코드 성격도, 코드 진행도 어느 하나 맞는 게 없었다.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청음은 청음에 대해 인지한 순간부터 실력이 는다. 나는 청음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청음 수업을 주에 한 번은 듣고 있었고, 매일 연습을 했고, 매일 음악과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에 귀가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상대도 아니고, 절대도 아닌 애매한 음감이었는데 절대 음감의 기질이 이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자 키보드에는 트랜스포즈(Transpose) 기능이 있다. 전조를 쉽게 도와주는 기능이다. 내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누르면 설정한 음정 변화에 맞게 '레미파#솔라시도레' 라거나 '시b도레미b파솔라시b'로 음을 바꿔주는 기능이다. 합주 중에 키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평소와 같이 트랜스포즈로 키를 바꿔 연주하는데 연주가 되지 않았다. 내가 'C'를 치는데, 'Bb'음이 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때 나는 멀쩡한 기능을 놔두고 머리로 키를 바꿔야 했지만, 절대가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에 엄청 기뻤다.
2학년이 됐고, 여전히 시창-청음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의 난이도가 높아져 단선율 문제는 Wayne Shorter, Charlie Parker의 솔로 라인이 되었고, 코드 퀄리티도 Tension Chord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열렬히 내 음감 향상을 위해 힘써주었기 때문이고(가진 자의 여유. 모두 절대음감이었다) 나도 조금씩 귀가 트이고 있었다. 오히려 Tension Chord를 듣게 되니 코드의 개성이 강해 판단이 더 쉬워졌다. (절대음감 중 이것을 힘들어했던 친구도 있다)
조금씩 귀가 트이니 재미가 붙었다. 그 당시 1시간 거리의 학원으로 일하러 다녔는데, 지하철 안에서 곡이나 솔로 카피를 했다. 첫 음만 잡고, 그 음을 기준으로 다른 음들을 듣고 그려 넣는 것이다. 솔로 카피를 하고도 시간이 남으면 베이스 루트를 카피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거기에 코드 퀄리티를 더했다. (그러면 근사한 리드싯이 완성된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피아노로 확인을 해보고, 정답을 찾고, 비교해 들어봤던 기억이 난다.
이때는 음감에 미쳐있던 시기라 듣는 음악마다 저게 무슨 음인지 찾곤 했다. 청음 교수님과도 종종 만났다. 음식을 먹으면서 교수님은 식당 안에 나오는 음악이 무슨 키인지, 무슨 코드인지 쉴 새 없이 물었고, 나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집중해서 대답하곤 했다.
이 때 음감이 엄청나게 향상됐다. 이때부터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미묘한 음정의 차이들도 느끼게 되었다. 굳이 첫 음을 찾지 않아도 70%의 확률로 음을 맞추게 되었고, 그렇게 졸업을 했다.
(그 당시 지하철에서 카피했던 악보. 어렵게 찾았다.)
졸업하고는 절대음감, 혹은 음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음감이 많이 좋아졌기에 음악 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고, 애당초 절대음감이 아닌 사람이 절대음감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독 방에 있는 냉장고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게 어떤 '음'으로 들렸다. 반신반의하며 확인해봤는데 맞았다. 소름이 돋았다. 나도 그런, 엄청난 능력인 절대 음감의 소유자가 된 것인가?
절대 음감이 된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소리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청소기 켜지는 소리는 물론이고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도 음으로 들렸다. 내 청소기는 '솔도레솔-' 으로 켜졌다가(이것은 정확한 음) 청소를 할 때는 '라-----레도'라는 진동 소리를 내면서 청소를 한다.
나는 플랫(b) 키에 유독 약했다. 샵(#) 키는 곧잘 들었는데 플랫(b) 키가 유독 구분이 힘들었다. Ab Key를 A Key로 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플랫(b) 키도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절대음감이 됐다고 생각한다.
절대음감이 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그때 내가 그토록 음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졌던 것도, 내 부족한 실력을 음감이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막상 절대음감을 가지고 나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내가 쓰는 곡이 그렇게 좋아지지도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음감은 어차피 보조해주는 역할이니까.
절대음감이 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좋은 점도 있다. 하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바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꼭 카피해야만 분석이 가능했다. 요즘은 어렵지 않은 곡은 들으면서 바로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이거다. 아마 절대음감이 아닌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약 올리기)
'사람의 말소리가 멜로디로 들린다.'
절대음감이 되고 나서야, 사람들이 하는 말에 리듬과 음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보통의 음감을 가진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 Jason Moran - Ringing My Phone >
이 영상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이 곡을 들었을 땐 아이디어가 획기적이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절대음감이 되고 보니 당연한 작업물이었다. 지천에 멜로디가 널려있는 것이다. 제이슨 모란도 절대음감이겠거니,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뜻은 몰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이 된다. 한국말보다 음의 도약이 커서 더욱 멜로디컬하다.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는(내 어성 기준) '솔라라라라-'이고, 감사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인도네시아어 뜨리마카시는 '솔솔솔도시b'이다. (리듬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 리듬까지 완벽한데) 나는 절대 음감이 되고서야 사람들이 매일 노래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보통 음악을 언어에 비유하곤 한다. 음악을 배우는 과정과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음감은 평생에 걸쳐 발전하니,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성을 듣는다던가, 3성을 듣는다거나 하는 일들. 60살 정도 되면 귀가 좋아져 한 번 들은 곡을 그 자리에서 음 하나 놓치지 않고 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좀 더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우리 모두 절대음감이 될 수 있다. 내가 해봤다. 여러분도 심심하면 해보시던지...(쿡쿡) 힘들겠지만 사람들의 멜로디를 들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