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하러 나오려는데, 엄마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어제 저녁 먹을 때 어떤 남자애가 널 계속 쳐다보더라. 너가 예쁜가 봐. 인도네시아에서 결혼하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우리 엄마가 이런 말을 하다니, 엄마에게서 이런 말을 듣다니. 곧장 카페를 가려다가, 방향을 틀어 아침 산책을 했다.
우리 부모님이 보는 나는 자랑하고 싶은 착한 딸이다. 일로는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지만 늘 사랑이 문제였다. 우리 집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연애 자체를 터부시했고, 앞서 밝혔듯 나는 모든 행복을 사랑에 두었기에 부모님 몰래 수도 없이 사랑을 하고 다녔다.
실수로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 엄마는 이미 동생을 통해 호구조사를 마쳤고, 나는 늘 너절한 남자만 만나기 때문에 엄마는 그것에 대해 함구했다. 엄마는 내게 직접 듣지 않았으므로, 남자친구가 없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깊은 낙담과 상심에 빠진 엄마는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경악스러운 생각을 해냈다.
부모님이 판사고 의사인, 막 고시에 붙은 남자와 선을 보라는 것이었다.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시달림을 받았고, 싫다고 성질도 내다가 지금 남자친구가 정말 좋다고 호소도 하다가, 결국 성화에 못이겨 그 남자와 연락을 했다.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어야했지만 나는 묘한 반발심에 그 남자와 이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대개 이런식으로.
10:02 밥 드셨어요? 오늘 날씨 좋네요.
21:00 일 때문에 이제야 봤네요 ㅠㅠ 죄송해요 ㅠㅠ
이 글을 쓰면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를 떠올렸고,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우리가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지금쯤 연인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지만(실은 그럴 수는 없다) 그 당시 나는 엄마에 대한 반항심을 오롯이 그 남자에게 풀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처음으로 사귀던 사람을 부모님께 기습적으로 보여드렸고 부모님은 절망에 빠졌다. 그때 얘기를 들어보니 충격에 휩싸인 아빠는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 엄마에게 나보고 헤어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동생에게 잘 좀 구슬려 헤어지게 만들라고 했다고 한다. 동생은 이런 상황을 슬쩍슬쩍 언질해주었고 난 웃다가 좀 슬프다가 미안해지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엄마는 어느 정도 체념을 했고, 나도 좀 더 편하게 내 남성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엄마 나는 돈 못 버는 남자가 좋아. 정말 미안해."라거나 "엄마 나는 남편이 4명 정도 있었으면 좋겠어. 어린 남자를 만나고 파." 같은 말들.
나도 엄마와 남자친구 얘기를 하고 싶은데, 딱히 할 얘기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자랑이라곤 고작 이런 것들이었다. "엄마. 내 남자친구는 컴퓨터를 되게 잘해." "엄마. 내 남자친구는 정말 동물을 사랑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
"인도네시아에서 결혼하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이 말에 담긴 엄마의 속뜻은 이랬다. 어차피 남편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 물가가 싼 이곳에 살아야 내가 고생을 덜 할 것 같다는 것이다. 항상 부모님의 생각은 우리를 뛰어넘는다. 문득 엄마의 여린 마음을 수도 없이 난도질 한 못된 딸이었음이 미안하고, 찡해졌다.
나는 보란 듯 더 너절한 남자를 만날 테고,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자랑이라곤 저런 것들이겠지만 살다 보면 그 너절한 남자들이 잘 될 수도 있지 뭐. 로또가 된다거나, 작품이 대박이 난다거나, 코인이 대박 날 수도 있지 뭐.
여리고 착한 우리 엄마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 봐봐. 내가 내 남자친구 똑똑하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