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다는 마사지를 받으러 왔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마사지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육체노동을 돈으로 산다는 느낌 때문에(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요)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 몸을 마구 만지는 것도 왠지 기분이 이상하고요. 1시간 코스를 예약해 저곳에 얼굴을 묻고 나서, 기묘한 한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휴대폰도 할 수 없고, 잠도 안 오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정적 아닌 정적 속에 마사지는 진행됐습니다. 가장 고역인 것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시간이라도 알면 그런대로 견디겠는데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어 고통의 시간이 계속됐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BGM처럼 나오던, 분위기 조성용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이 귀에 들어옵니다.
(A Minor Pentatonic Scale로 만들어진 인도네시아 악기)
말 그대로 마사지 분위기 조성용으로 틀어놓은 음악이었어요. 집중해서 들어보니 D(레) F(파) G(솔) A(라) C(도) 음이 반복해서 나오더군요. 음악에 쓰이는 음을 높이의 차례대로 배열한 음의 층계를 음계라고 합니다. 저 음계는 서양식으로 말하면 D Minor Pentatonic Scale, 한국식으로 말하면 계면조입니다.
저번에 제가 올렸던 고려 음악 분석기에서 고려 음악은 평조를 사용한다고 했는데요. 평조는 쉽게 생각하면 Major Scale, 장음계, 장조의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편할 듯합니다. 계면조는 반대로 Minor Scale, 단음계, 단조와 닮아있는 스케일이 되지요. 장조/단조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보태자면 장조는 밝은 느낌, 단조는 어두운 느낌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풀어보았어요)
기본적으로 우울함을 가지고 있는 음계지만 제가 들은 음악은 우울하다기보다는 몽롱한 느낌이 좀 더 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정확한 박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음악에서 하나의 악구를 프레이즈(Phrase)라고 부릅니다. 글로 빗대자면 글 속에 있는 하나의 문장 같은 개념이지요. 시에 운율이 있듯, 음악에도 박자가 있는데 이 박자가 일정하지 않고 연주자에 호흡에 맞춰 진행됩니다. 그렇다 보니 하나의 곡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좀 더 짧은 호흡인, 프레이즈의 구성으로 음악이 흘러가고 있었어요.
또 다른 이유로는 음정(Pitch)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선율을 이름 모를 목관악기가 연주하는 곡이었는데, 연주자의 호흡에 따라 음도 미세하게 높낮이가 달라지더군요. 서양 음악에서는 절대 Pitch를 사용합니다. 440Hz의 'A' 음을 저희가 '라'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런데 이 곡은 'A(라)'를 연주한다고 하면, 연주자의 감정에 따라 'G#(솔#)'과 '라(A)' 사이 어딘가의 미묘한, 음정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절대 음에 길든 저는 그 부분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국악의 특징도 정확한 Pitch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악기는 대부분 악기 조율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많이 개량됐기 때문에 서양의 절대 음에 맞춰 연주할 수 있지만, 원래는 연주자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음정을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요즘은 국악 연주에 피아노가 많이 들어가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론 피아노가 들어간 순간부터 절대 음을 사용해야 해 국악의 매력이 많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쓴 국악 곡에는 항상 피아노가 들어간다는게 아이러니네요...)
체감상 7분 정도의 곡이 연달아 나오는데 두 곡 모두 D Minor Pentatonic Scale을 이용하더라고요. 고작 두 곡 듣고 인도네시아 음악은 모두 같은 스케일을 쓴다고 생각하던 중에, E Minor Pentatonic Scale의 곡이 나왔습니다. E Minor Pentatonic Scale은 E(미) G(솔) A(라) B(시) D(레)로 구성되어있어요. 앞의 스케일이랑 구성 간격은 똑같지만 시작점이 다른 곡입니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 느낌이랄까요.
앞선 두 곡은 잔잔하게 흘러갔는데 이 곡은 멜로디 움직임이 역동적이더군요. 앞의 곡은 멜로디의 순차 진행이 많았고, 뒤의 곡은 멜로디의 도약이 많아 감정의 요동이 더 컸습니다. 앞에 두 곡은 곡의 기승전결이 없었지만 이 곡은 나름의 클라이막스도 있더군요. 곡이 끝나고 한 음을 아주 길게 연주하는데, 제가 숨을 죽여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는 음이었습니다.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A Major Key(라장조)의 곡이 나오더군요. 심지어 A음을 페달 베이스로 사용한 코드 진행 A | D/A | A | D/A의 진행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어요. 단조의 우울한 느낌에 젖어있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장조가, 그것도 정확한 화성으로 나오니 극락에 올라가는 기분이 들더군요. 마침 받고 있던 마사지도 그 부분쯤 해서 두드리기가 시작돼, 저는 속으로 이 1시간 코스에 음악도 포함돼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지가 끝났어요. 덕분에 제가 마사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기묘하고 나른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음악을 설명하며 편의상 Minor Pentatonic Scale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이 이름은 서양 음악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선 음은 같지만 이 음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전통 음악에 왜 이런 음들이 많이 쓰이는지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악기의 차이만 있을 뿐 음악이나 호흡은 국악과 다르지 않아 국악기로 연주하면 국악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10일간의 여행에 벌써 5일이 지났습니다. 어쩌다보니 2박 3일 이상 여행을 와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긴 여행은 살면서 처음이라 낯선 마음이 더 큽니다.
예전에 동료가 피아노를 며칠만 안쳐도 죽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며칠 내내 피아노를 안쳐도 아무렇지 않은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무척이나 피아노가 그리워요. 그간 제대로 된 연습을 하지 않아서 피아노를 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스쳐가듯 한번씩 건반을 눌렀던 것들도 연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뜬금없이 Dm7 코드를 잡아보고싶기도 하고, 오늘 들은 스케일을 손으로 쳐보고 싶기도 합니다. 돌아가면 진짜 연습 열심히하고, 곡 열심히 만들겠다고 말하자마자 사라질 다짐을 지워지지 않을 이 글에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