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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em essay @jjy의 샘이 깊은 물 - 체하더니 척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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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하더니 척하느라 @jjy

이른 아침 흐린 하늘을 이고 걸어간다.
멀리 올라가는 연기가 산을 넘어 흐린 하늘에 닿자
각각 흩어진다.

누군가 빈 밭에서 오물을 태우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렇게 잔뜩 흐린 비오기 전날이나 이슬비 내리는 날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불을 놓았다.
그때만 해도 잡초도 태우고 병충해를 예방한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권했었지만 요즘엔 두렁 태우기로 인한 득보다는
잠깐의 부주의가 산불로 이어지는 등 사고의 위험이 있어
이를 금지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야 논두렁이나 밭두렁이 토지의 경계에 불과하지만
농사철에는 이웃이 품앗이를 하며 밥을 먹는 잔치마당이고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랑방이었다. 지나가는 우체부도
엿장수도 허물없이 논두렁에 앉아 밥을 먹기도 했다.

농촌지역에 군대가 주둔하고 직업군인들이 가족들과 살게 되면서
조상사라는 사람이 동네에 살게 되었다.
군인들의 월급이 그 당시 얼마였는지 몰라도 어려운
농촌 살림보다는 넉넉했었는지 언제나 촌사람들이라며
무시하는 말투였다.

모내기철이 되어 논두렁에 모여 밥을 먹고 있을 때
조상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골 인심에 불러 식사를 권하자
땅강아지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땅바닥에서 밥을 먹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후 밭머리에서 새참을 먹던 사람들이 인사로 할 술 뜨고 가라고
권했더니 콧방귀를 뀌며 지나갔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농촌에서는 결혼식을 하는 집이 많았다.
한 해 농사를 지어 잔치를 하게 되고 요즘처럼 예식장이 아니라
신부 집 마당이 예식장이었다. 그리고 이웃집 뿐 아니라 마당에
멍석 하나 깔면 그 것으로 충분했다.
그 잔치 마당을 지나가는 조상사는 국수 한 그릇 먹고 가라는
말에도 흘깃거리며 대답도 없이 지나갔다.

몇 해를 그렇게 동네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조상사를
마을 사람들도 본체만체 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에게
그 흔한 막걸리 한 잔 권하지 않았고 부대에서 쌀이나 부식
석유 같은 물품에 손을 댄 것이 문제가 되어 조상사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더 이상 군대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연탄 살 돈이 없어 냉방에서 떨다 하는 수 없이
나무를 하려고 산엘 갔으나 낫질도 지게질도 못 하는 처지에
땔나무는 고사하고 마른 억새풀만 모아 겨우 끌고 왔다.

늦은 가을 보리파종을 하면서 햇살 바른 밭두렁에 둘러앉아
배춧국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땅바닥에서는 밥을 먹지 않는 조상사를 부르지 않았다.
옆집 상을 당해도 조상사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과 왕래를 하지 않고 살았다.

눈을 잔뜩 안은 솔가지가 찢어지고 바람이 몹시 불던 밤
너풀거리는 불길을 피해 소리를 지르며 내복바람에 뛰어나온
조상사와 그의 가족들은 제일 경멸하던 이웃집 부엌 뒤에 딸린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숟가락 하나 없이 뛰쳐나온
조상사를 찾아갔다. 당장 덮고 잘 이부자리며 쌀과 그릇 같은
살림살이 몇 가지를 가지고 가서 위로를 하는데
조상사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설움에 복받친
그의 아내가 그간의 얘기를 하며 목이 메었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일도 하고 타작 밥도 같이 먹고 싶어도
남편이 무서워 안 먹고도 먹은 체 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학교 가는 아이들 도시락도 못 싸주며 배부른 척 하며 지옥처럼
살았다고 말하는 조상사의 아내는 콧물까지 떨구었다.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이월 초하루에 섬 만두를 먹은 다음날 새벽
제일먼저 쇠스랑을 들고 두엄더미로 들어선 사람은 조상사였다.


대문을 그려 주신 @cheongpyeongyull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