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사.여] 크로아티아 두보르브니크 가이드 - 1(개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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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들의 여행 / 게.사.여
크로아티아 두보르브니크 / Duborvnik - 개관편





안녕하세요~ @splay08 입니다.
이제 여행 시즌이 시작되서 글쓰는 속도가 많이 느려지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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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붐을 만든 프로그램이죠

그래도 새로 한편 올립니다.
바로 최고의 관광지이자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보르브니크라는 곳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꽃누나의 크로아티아편의 하이라이트로 유명한 곳이지요~

게.사.여 크로아티아 - 두보르브니크편 시작해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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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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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르브니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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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르브니크 성벽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수많은 크로아티아의 관광지 오직 한곳만을 고른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손꼽는 곳이 “두브로브니크”입니다.

어쩌면 지중해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곳일수도 있는 작고 화려하며 완벽한 “구시가지와 중세 성벽”을 가진 두브로브니크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하고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곳입니다.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두브로브니크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칭송하였고 작가 버나드 쇼는 “만약 지상의 낙원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라며, 이 중세도시를 극찬했습니다.

“세계의 보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작은 구시가지는 아름다운 중세 건축들과 무역의 강자였던 라구사(Lagusa)의 자취인 귀중한 유물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현대가 되어 라구사 시민들이 “자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보물과도 바꿀 수 없다.”라며, 수많은 전쟁을 벌렸던 “두브로브니크”에 매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중세의 향수를 느끼러 길고긴 크로아티아의 땅끝인 이곳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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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두보르브니크) / 1911




두브로브니크의 역사

두브로브니크 지역은 “고대 일리리아(Illyrian)”인들이 살던곳이었고, 이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에게는 수많은 섬들이 가득한 달마티아 지역과 더불어 그리스 신화들의 배경이었습니다.

현재의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에는 6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이전인 로마시대때는 남쪽으로 십여키로미터 떨어진 차브타트(Cavtat)가 지역의 중심이었습니다.

6세기, 서로마의 멸망 백년후에 발칸 반도로 슬라브인들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군사적인 보호를 받을수 없었던 옛로마인들은 614년 슬라브인을 피해, 작은 돌섬으로 숨어들었고, 돌이란 뜻을가진 라틴어“라우사(lausa)”가 새로 생긴 도시의 이름인 “라구사(Lagusa)로 바뀝니다.

라구사는 7세기, 비잔틴 제국에게 지배 당했지만, 11세기에는 슬라브인들과 힘을 합쳐, 섬과 육지사이를 매립해 도시를 확장하고 “자치 도시국가”로서 자립을 시도하지만, 1204년 베네치아의 도제인 헨리쿠스 단돌로(Henricus Dandolo)의 4차 십자군 원정중에 침략당하고 1358년까지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중부 유럽과 지중해의 패자였던 헝가리와 베네치아의 조약으로 자유를 되찾게된 “라구사 공화국”은 자립이 필요했고, 오스만투르크와 조공 조약을 맺음으로 유럽에 향신료와 사치품을 공급하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한 라구사 공화국은 한때,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와 자웅을 겨룰정도로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였지만 17세기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통과하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견되면서, 포루투갈, 스페인등의 신흥 해상 국가들에 뒤쳐지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1667년 강력한 지진을 겪으면서 구시가지의 대부분이 매몰되었고 인구의 오분의 일을 잃게되는 비극으로 힘을 잃은 라구사는 1806년 나폴레옹과 프랑스군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뒤이어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어, 자유 도시국가인 라구사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던 이름인 두브로브니크로 이름을 개명당합니다.

이후 두브로브니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손에서 벗어나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잠시 편입되었고, 2차 세계 대전중에는 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종신 대통령이 되는 요시프 티토(Josip Tito)가 이끄는 파르티잔(Partisan)들이 나치들과 싸우는 기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세계 대전후 두브로브니크는 위치상으로 보스니아나 세력이 제일 컷던 세르비아의 소유가 되었어야 하지만 유고 연방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세르비아계를 견제하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소유가 됩니다.

이 일은 유고내전(1991~1995)간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이 두브로브닉에 공격을 하게된 원인이 되는데, 7개월간 2천여회의 포격으로 구시가 건물의 56%가 파괴됩니다.

하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를 사랑했고 당시 프랑스 학술원장인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을 중심으로 “세계의 보물”인 드보르브닉을 구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됩니다.

결국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NATO와 EU의 압박으로 공격을 중지하게되며, 전쟁 이후에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열렬한 참여와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빠르게 건물과 유적을 복원하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구시가지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모레 뵙겟습니다. 출장중이라 글 편집이 쉽지 않습니다 ㅠㅠ
모레는 가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관광지 편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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