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섭생과 제주의 생애

제주에 다녀왔다. 여행 전날까지도 카메라를 챙길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카메라는 3 킬로그램이 넘는다. 그래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면 몇 번이고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든다. 무게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페트병 물통을 떠올려 보자. 2 리터 들이가 2 킬로그램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건, 무게가 줄지 않는 큰 페트병 하나를 쥐고, 어깨에 들쳐 매고, 등에 걸어가며 하루 종일 걷는 것과 같다.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하루라도 날씨가 공을 쳤다면 나는 당장 카메라부터 두고 집을 나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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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에는 한글이 적혀 있는데, 도로에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섭생이 생소하게 우뚝했다. 우리는 두 시간 비행에도 지쳐버렸다. 소금기가 느껴지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피상적인 농을 주고받았다. 예를 들면, "요즘 제주에 많은 건 '카페, 차, 부동산' 이예요." 같은 애잔한 빈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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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 해수욕장이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지평선이었다. 횡으로 쉬이 끝이 나지 않게 펼쳐진 자연. 그 앞에서 어느 속세의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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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둘이서, 셋이서, 혹은 홀로 해변을 걸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다, 행복하다는 말 대신, 카메라 셔터 소리로 현대의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도 이들과 다를 바 없어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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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차서 바다에 물결이 생겼다. 나는 이것이 꼭 제주의 지문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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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로 향하는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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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델 문도. 커피 맛은 자리 맛이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자리한 카페다. 해수욕장 바로 앞(정말 코앞이다)에 지어진 카페. 난개발 훨씬 이전. 그러니까 환경이나 조경에 대한 인식이 아무 것도 없었을 때부터 지어진 카페라서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나는 이 곳에서 넷플릭스 이야기를 하다가, 정말 말도 안 되는 기회에 국립공원 안에 별장을 지을 수 있게 된 건축물 다큐멘터리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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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짜증이 많았다. 어느 날 문득. 옛날 내가 쓴 글을 읽어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으로 볼멘 사람이 차분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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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이들이 있다. 가족이라 부르는 이, 늘 친절한 이. 연배와 세월을 가리지 않고 곁에서 함께 짜증도 내고, 웃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 이들의 얼굴. 모든 친절이 업보처럼 쌓여, 앞으로 한 무더기 쏟아질 만치의 복을 받을 이들의 존재.

그렇지만 좋은 이들 곁에 있어도 이 자아는 좀체 개선의 여지가 없다. 나는 여전히 편향적이고, 취향(이라 부르기엔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위주로 움직이며, 말을 뱉어놓고 후회하는 날이 수십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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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 한 쇳덩이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경이를 느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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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바위의 괴기하고도 차분한 암흑을 밟으면서 발끝의 감각을 일깨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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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가 빠져나간 자리에 미처 함께 가지 못한 이의 촉촉한 바닷물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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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외로움의 그림자. 그리고 노환. 나를 찾는 이가 줄어들고, 내가 너를 찾는 일이 줄어드는 이 시대에, 나는 대상 없는 절절함 때문에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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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푸르며, 노랗게 녹이 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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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르는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싶었지만, 나는 귀하의 이름을 몰라 꺽꺽 대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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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화살처럼 튀어 날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직접 보고 올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아니, 정말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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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장난처럼 쌓아 올린 소원을 찍었다. 바람은 작은 소원이라도 허투루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잦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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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는 해녀(海女). 성별이 붙는 어떤 말도 상처가 될까봐 조심스러운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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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의 일 세기 동안 살아본 바. 나를 둘러싼 인연은 대충 네 종류로. 갖가지 성향에 따라 느슨-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고한다.

첫 번째는, 내가 데면데면하지만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경우.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지만 데면데면한 상대.

세 번째가 내가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의무로 맺어진 공간을 끊임없이 스치는 두 멀뚱한 인간상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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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칭코 구슬처럼 내가 아는 이들의 얼굴을 모두 떠올려서는 저 네 가지 만상(萬象) 위에 차례대로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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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랑이라 말을 꺼내온 모든 이들에게.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내게 사랑을 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사는 동안 많은 의미와 더 큰 아름다움을 찾기를 바랍니다. 제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부디 만나길 기원합니다.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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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은 비자림을 걸으면서도 계속됐다. 무엇이 만날 그리 미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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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에 근거하여 이야기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모두 오랜 시간 동안 갈등을 겪고 앎의 시간을 거쳤어. 예를 들면 컴퓨터가 그렇고, 5 년 정도 쓴 내 카메라가 있고, 오랜 지기들이 있지.

나는 그래서 새로운 인연을 알고, 그 이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영원한 행복의 여정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정을 붙이길 시작하는 일일 거야. 일 이라고, 일. 알아가고, 실수하고, 고통받고. 그러니까... 사서 고생인 거지. 행복은 그 과정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보상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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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이 그리도 확고한지. 과거에 내가 적어놓은 메모를 보며 웃음이 났다. 자연은 내가 무슨 지랄을 하든 자라날 것이고, 떨어져 썩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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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것도 당연한 것이다. 서른 살 내가 발견한 새로운 재미는 좋은 걸 먹어가며 상념을 잊는 것이다. 이 땅을 힘차게 살아갔던 생물이 식탁에 오르는 경이를 인디언처럼 숭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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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보지 못한 심해를 헤엄치고, 바위틈바구니에서 천적의 공격을 피하던 생물은 무채 위에 올라 비닐랩에 산산이 해체됐다. 재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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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맛있는 카페에서. 모든 움직임은 고통이고, 나는 스스로 고통받고, 자신을 위해 선물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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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는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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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음이 드리우는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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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켜가며 괴로울 것이라면 도대체 왜 사는가? 존재론적 질문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나는 사과 덩어리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울컥했다가도 말을 삼키고. 다시 한번 그 덩어리를 목구멍까지 올려서 잘게 부수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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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자연과 카페. 제주의 만물은 나의 생애에 관심이 없다. 때로는 홀로 두는 무심함이 위로가 된다. 어떤 날에는 고개를 꺾어 들고 엎드려 흐느끼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날에는 무심한 듯 그 옆을 모른 체 지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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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제 할 말을 나누는 사람들. 그 모습을 심드렁히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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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기능을 다 하고 새로운 기능을 찾은 인공물의 위대한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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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들고 인간이 심어놓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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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중에 도깨비바늘이라는 풀이 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창궐하는데,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어서 온갖 털과 옷감에 들러붙는다. 열매는 낮은 곳을 누비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몸에 붙어서 씨앗을 뿌린다. 내 기억하는 이름은 '도깨비풀'이었고, 우리 할미는 이것을 '도둑놈'이라 불렀다. 허락도 없이 제 집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도깨비풀 입장에서 생물은 운반자 외에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동물이고, 많은 사냥 전적이 있고, 재산이 얼만큼이 있으며, 어떤 차를 타는지, 누구와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깨비풀에게 동물(動物)은 그저 움직이는 만물이다. 인간이 분류한 100만 종의 물성이 도깨비 풀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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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무심함. 그 아래서 한참을 잡생각과 씨름하다 왔다. 정신의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니 의미가 아주 없다 싶으면서도 상쾌하니 웃음이 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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