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의 세계 (2/3: 팝아트와 미디어 아트)

현대 미술의 세계

팝아트와 미디어 아트

팝아트(Pop Art)를 먼저 이야기해 보자. 흔히들 팝아트는 ‘대충 그린 카툰 풍 작화를 비싸게 팔아먹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강경한 미술 애호가들은 거품을 물고, 대중은 손뼉치며 호응하는 말이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

팝아트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추상 표현주의에 대한 거부감으로 발생한 예술이다. 팝-아티스트들은 상업용 상품에 의미를 재부여하는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한다. 상품(Commercial product)이 가지고 있는 단순 명로한 메시지와 친숙한 디자인에 메시지를 덮어쓴다. 이것은 감상하는 이에게 유머와 해학, 풍자의 감정을 선사한다. 지나가듯 보면, 팝아트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예술처럼 보인다.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대표적인 팝아트 예술가로, 그의 캠밸 수프(Campbell Soup) 캔 작업이 유명하다. 이 작업은 실제로 보면 참으로 명쾌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이것의 의미는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ap_841206500462-e1460473018720 캠밸 수프 캔(Campbell soup cans), 1962, 앤디 워홀

캠밸 수프 캔 작업은 한 캔만 있는 것보다 많은 캔이 반복되어 있을 때 작가의 의도가 더 잘 드러난다. 복수의 캔에 쓰여진 라벨(맛)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워홀은 캠밸 수프 작업을 통해 시장에 유통되는 맛, 그리고 ‘수 없이 많은 맛’이라는 메시지에서 '선택지의 모순'을 꼬집는다. ‘선택지의 모순’이란 소비자가 아무리 많은 맛을 선택할 수 있다 한들 그것은 제작사가 제한하는 유한한 선택지에 불과한 모순을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수프의 맛, 브랜드, 가지 수는 셈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가가 만들어낸 유한한 선택에 불과하다. ‘자본가-상품-소비자’라는 보이지 않는 끈은 자본가의 의도대로 완성된다. 소비자는 자신이 무한한 선택을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소비자는 자본가의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산업사회 이전 과거에는 운명과 결정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다수 노동자들의 앞길을 결정한다. 그들은 상품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로 우리를 현혹하고 행동하게 한다. 이것이 워홀이 말하고 싶었던 지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그의 작업 앞에서 서성일 수록, 카메라를 등지고 그것을 바라볼 수록, 워홀의 메시지는 점점 커진다.

abandoned-prison-in-cuba-031 판옵티콘(panopticon)형태를 한 프레시디오 모델로 감옥, 쿠바

조지 오웰은 그의 저작 <1984>에서 모든 선택지가 획일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그렇지만 워홀이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디스토피아란, 유한한 선택지가 수 없이 늘어져 있어서 ‘개인이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착각’하는 삶이다. 워홀은 실크스크린, 복제와 같은 키워드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것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량 생산의 성질은 ‘무한해 보이는 유한 선택’이라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미디어 아트


fprbbx9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 대륙(Electronic Super Highway), 1995, 백남준, 스미소니언 박물관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 그는 예술계에 어떤 질문을 던졌기에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의 주된 작업 매개는 TV다. TV는 한자로 수상기(受像機)로, 직역하면 방송된 전파 영상을 화상으로 변화시키는 장치다. 그렇지만 백남준의 TV는 전파를 수신받아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TV는 스스로 살아 있는 듯, 메시지를 반복 재생한다. 처음 보기에 그의 작업은 뒤샹의 샘처럼 이미 있는 물건을 가져다 놓고 예술이라 우기는 것과 다를 것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백남준은 회화 작가들의 주 도구가 붓인 것과 마찬가지로, TV를 자신의 작업 도구로 사용한 첫 번째 예술가다.

당시 예술가들은 디지털 문명에 부정적이었다. 어떤 예술가는 요즘에도 디지털 매체 예술을 극단적으로 꺼린다. 그렇지만 백남준은 예술가에게 선이나 규범 따위는 없다는 듯, 태연하게 TV를 자신의 설치 작업 세계에 들여 놓는다. 이러한 결단력은 그가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예술을 시작했던 경력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우리는 백남준의 작업에서 TV를 의식하지만, 의미를 곰곰이 따져 보면 그것은 TV가 아니다. 그는 TV를 '메시지를 받는 매체'에서 ‘메시지를 직접 생산하는 매체’로 재탄생 시켰다. 그의 작업 속 TV는 스스로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뱉는 설파의 도구다. 디지털 도구는 그렇게 최초로 의미 변용으로 작업 세계에 사용된다. 백남준은 첨단 기계 문물과 인간 예술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고민한 첫 번째 인물로,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 아트 및 각종 디지털 예술 작업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결국 팝아트와 미디어 아트는 대중의 곁에 서는 듯한 기시감으로 유명세를 얻는 동시에, 풍자라는 예술성까지 획득하면서 다면적 예술 세계의 대표주자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현대 미술의 세계 - 3. 현대 미술과 시계 미감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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