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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일기

나는 일기 쓰기 중독자이다. 매년 12월이 되면 내년에 쓸 일기장을 사느라 분주해진다. 여러 온라인 서점과 쇼핑몰을 드나들며 수백 개의 다이어리 중에서 고심해서 고른다. 크기, 내지 구성, 종이 두께 등을 고려해서 마음에 딱 드는 걸 찾을 때까지 결코 검색을 멈추지 않는다.

정작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사는 게 보통 지난 해에 썼던 다이어리의 개정판이라 김이 새지만, 아무튼 올해도 작년에 미리 사둔 다이어리를 열심히 쓰고 있다. 이 블로그에 올리는 것처럼 길게 쓰는 건 아니고 5,6줄 정도로 짧게 쓴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ㅇㅇ출판사 팀장 전화 옴. 차기작 묻기에 이제 글 안 쓴다고 이야기했고 기분이 홀가분했다. 당분간 출간 욕심 없이 그저 쓰련다. 꽤 만족스럽게 썼다. 지금까지 쓴 거 조합해서 추려보자. 이제 진짜 깔끔하게,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는 도입부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당분간은 분량보다 시간으로 글을 써야겠다. 음악도 듣지 말고. 4시간 동안.

매일 하는 거라고는 집에 틀어박혀 글 쓰는 것밖에 없어서 일기의 90% 이상이 다 글 얘기다. 가끔 외출을 하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 그 얘길 쓰기도 하지만, 드문 편이다.

아무튼 이 다이어리 말고도 부정기적으로 쓰는 일기- 라기보단 주기쯤 되는 일기장이 따로 있다. 그건 일반적인 줄노트에다 줄줄 쓰는 거라 꽤 길게 쓴다. 또 컴퓨터 하드에 폴더를 만들어 놓고 워드패드 텍스트 파일로 쓰는 일기도 있다. 그리고 최근엔 부쩍 게을러졌지만 이 블로그도 나의 일기장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꿈 일기장도 있다. 한때 나는 자고 일어나면 매일 아침(실은 매일 오후)마다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고 간밤에 꾼 꿈을 기록했다. 당시 글쓰기 슬럼프가 너무 심해 제대로 된 글을 하루에 100자도 쓰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꿈을 기록하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글을 조금이나마 길게 쓰고 싶었다.

또 평소 맨정신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꿈을 통해 얻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리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어제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다가 꿈 일기장 파일을 읽어봤다. 꿈이라는 게 그렇듯,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이런 꿈을 꿨던 적이 있구나 싶어 재미있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중에서 유난히 특이했던 꿈 세 개를 뽑아 올려본다.



20161002

꿈에서도 난 달아날 수 없어요. 정말 그랬다. 내가 죽인 여자의 소식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했다.

20대 후반, 어쩌면 30대 초반의 주부였다. 얇은 가디건에 발목까지 오는 긴 롱치마. 장지갑을 손에 들었다. 목을 졸랐고, 죽었고, 시체는 아파트 뒤편 공사장에 묻었다. 커다란 김장통에 흙을 잔뜩 채운 뒤 그녀의 시체를 묻은 곳 위에 올렸다. 이 기억이 분명히 있는데, 그후 나는 꿈에서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패닉이 되어 아파트를 돌아다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1층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안내원처럼 경비가 앉아 있었는데, 더 나쁜 건 그 옆이 바로 파출소여서 경비처럼 경찰이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안내소 앞 투명 유리창에 안내문이 붙은 걸 읽어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죽인 여자를 찾는 이야기는 없었다. 시시콜콜한 거, 식염을 판다든가 밤에 개소리 안 나게 조용히 하라든가. 하지만 실종된 주부를 찾는 내용은 없다.

일주일쯤 됐는데, 내가 그 여자를 죽인 지가.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아이는 없다 해도 분명 남편은 있을 텐데 어째서 자기 부인을 찾지 않는가?

나는 증거를 많이 남겼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범죄였고 나는 시체를 급히 묻고 도망치느라 바빴기에 증거를 훼손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너무나 평화롭다. 한 명의 여자가 죽은 걸로 세상의 평화가 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티코처럼 조그만 차를 탔고 고속도로로 도망쳤다. 차가 혼잡하게 얽혀 있는 도로. 요리조리 끼어들기를 하면서 과거를 돌아보았고,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게 죄책감이구나. 나는 살인자구나. 감옥에 간다면, 10년쯤 갖힌다면 그동안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감옥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울었고, 문득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42분이었다. 막 깨어난 정신은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감옥에 가면 글을 쓸 수 있을지, 그 글을 출판할 수 있을지를.



20161127

하얀 복도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내 차례를 기다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뭘 하려고 줄을 서 있는지 아는 건 하나도 없이 그저 사람들 뒤에 서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내 뒤엔 몇 없고 내 앞은 엄청나게 많아서 줄의 끝이 어딘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 두 마리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뒤로 갔다. 새끼 고양이처럼 꼬리를 바짝 세우고 빠른 발걸음으로 가는 고양이를 쫓아가려고 다른 녀석을 줄에 세워 두고 따라갔다.

고양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주 더럽고 끔찍한 곳이었다. 새빨갛고 검붉은 공간. 동물의 내장 같은 게 온 사방에 널려 있었고 큼직한 구더기, 벌레 등등. 내가 싫어하는 걸 죄다 모아놓은 곳 같았다.

그 속에서 고양이는 거침없이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고양이를 되찾고 싶었지만 코앞에 있는 내장 뭉치가 역겨워서 도저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화장실 입구에 발을 걸친 채로 소리쳐 고양이를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는 오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내장. 선홍색 피부.

잠이 깨고 나서 한동안 혼란스러웠고 발치의 고양이들을 확인했다. 이게 무엇을 암시하는 꿈인지 알아내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쩌면 꿈을 꾼 이유도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고양이들을 버려두다시피 하고, 한 공간에서 각자 사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에. 어쨌든 굉장히 선명한 꿈이었고 잊고 싶지 않은 꿈이라 기록해 둔다.



20161210

남자친구가 준비한 결혼식은 엉망진창이었다. 식장은 마치 장례식장 같았다. 제사상처럼 몇가지 전과 다과 밥 반찬 같은 게 밥상에 차려져 있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었는데, 일반적인 웨딩드레스와 달리 꼭 교회 성가대원의 가운처럼 축 늘어지고 처량맞은 모양새였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게 결코 결혼식일 리 없으며, 이따위 결혼으로 행복해질 리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어째서인지 남자친구가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게 굴었기에 그를 믿고 싶었다.

하객은 60명이 올 예정이었는데, 정작 다 모인 하객들 수는 불과 20명도 되지 않았다. 이런 결혼식에 감히 부모님을 모실 수 없다고 울부짖었고 남자친구는 나를 달래지 않았다. 반대로 더욱 자신만만하게 나를 설득하려 들더니, 막판에는 이 모든 게 장난이라 고백했다.

이깟 장난을 위해 들인 돈이 백만원이라 해서 나는 더 기가 찼고 내 곡소리에 식장은 그야말로 장례식장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 하객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고 식장도 아니었고 내 집에 있었지만, 그놈의 처량맞은 성가대원 드레스만은 여전했다.

상당히 비참했고,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입버릇이 튀어나왔다. 내게 일생의 단 한번 주인공이 되는 날 따위 있을 리 없지. 그런 사치를 내가 부릴 수 있을 리 없지 등등.

잠에서 깨고 나니 아무 죄 없는 남자친구가 미웠다. 어쨌든 이런 꿈을 꾼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쫓기고 있다는 거, 도피하고 싶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