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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훅 들어온 시절의 이야기

보이스톡이 왔다. 한국 방문 중인 지인으로부터이다. 받지 않았다. 밀린 잠을 막 자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이어 바로 톡이 왔다.

"000 알아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보이스톡을 해보았다. 어디에서 들어본 이름이다싶기도 하고, 연상되는 모습이 너무어렴풋해서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000 알아요?"

재차 물어본 지인에게 글쎄, 음, 알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라는 말을 했다. 그녀는 000에게 내 이름을 이야기했고, 바로 아무개누나라는 답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내 지인의 베프의 남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의 대학 같은 학과 2년 후배라고 한다. 세상 참 좁다.

겨우 사진을 얻어 보게 된 이후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추억속 장면들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쩜 좋아!

그 아이는, 아니 내 지인의 베프의 남편은 내가 1년의 휴학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간 시절의 신입생이었다. 엊그제 이야기한 그 똑똑한 카사노바 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한지 24시간도 안되어 같은 시기의 사람이 오늘의 나의 현실로 훅 들어왔다. 벌써 20년은 족히 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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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늘 백팩을 메고 다녔고, 웃을때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잘 웃기도 하였지만, 애교가 넘치던 친구였다. 너무 귀여워서 내가 볼따구를 자주 잡아당겼던 것 같다. 으이구 귀여워 이러면서. 그 귀여웠던 친구는 오늘의 사진속에도 웃고 있었고, 보조개가 들어갔고, 여전히 귀여웠다. 그리고 배가 볼록한 아저씨가 되었다.

신입생 시절 이후에 기억이 없는 걸 보면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다시 복학했을 때에도 내가 학교에 남아 있는 걸 보며 엄청 반가워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는 군대를 다녀온 내 동기들과 같은 해에 졸업을 했기 때문에 내 기억속에는 너무나 많은 신,복학생들이 있다. 위아래로 12년정도의 터울이 나는 동문들과 같이 학교를 다닌듯 하다.

내가 밥을 많이 사줬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그럴 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내가 늘 남자들하고만 다녔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에 여학생이 별로 없는데다가 남자가 편했으니까. 내가 순수한 선배였다고 한다. 그 나이엔 누구나 다 순수하지 않았을까.

그 시절, 나는 내 모습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앨범에 꽂혀져 있는 사진 몇장으로 추측해보건데, 조금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선머슴처럼 옷을 대충 입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도 그럴것이 생활적으로 사상적으로 가장 고민이 컸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평생 해야 할 고민중 절반은 그 시기에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학교로 돌아온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이름 석자로 유명해져 있어서 말과 행동, 생활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과 뿐만 아니라, 내가 활동하던 동아리나 단체에서는 학교로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몸짓을 서슴치 않았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나는 점점 말수를 줄여갔다. 결국 나는 도서관과, 군대를 면제받은 동기 몇몇과, 과학생회를 선택했다. 소수에 속하기 위해 사람들 만나는걸 조심스러워 했고, 술도 전혀 안 마셨고, 김광석 노래를 듣기 위해 혼자 어둑한 까페를 찾아가는 걸 좋아했고, 그리고 생애 첫 짝사랑을 시작했다.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처참한 시절이었고, 의연하려 노력해도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다. 가까이 하면 비극이지만 돌아서서 보면 삶 자체는 여러 편의 희극이듯이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쁜 추억들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한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도 안다. 때론 그를 확인하는 과정이 지금에 와서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오랜 해외생활로 옛인연들과 모두 연락이 닿지 않음을 감사하며 인연을 좇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처럼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 경우에는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대범하고 자연스럽게 옛추억에 빠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에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내 모습도 언젠간 추억이 될테니까. 언제 어디에서 툭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연이 될수도 있으니 지금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도 잘해줘야겠다. 스팀잇 이웃 중에서도 과거의 인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부디 이것만큼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