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필멸 생성(devenir mortel ; becoming-mortal)' : 에피쿠로스와의 관련성

동물 생성, 또는 필멸(必滅) 생성(devenir mortel)



"우리는 동물이 죽는 그만큼 더욱 더 동물로 생성한다. 그리고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반대로, 죽는 법을 알고 있으며 그 의미나 예감을 갖고 있는 건 오히려 동물이다. 문학은, 로런스에 따르면, 호저의 죽음과 함께 시작하며, 또는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빨갛고 짧은 다리들은 가엾게 뻗어 있구나." 모리츠가 말했듯, 우리는 죽는 송아지들을 위해 글쓴다.언어는 여성, 동물, 분자 등의 우회로들에 이르러야만 한다. 모든 우회로는 필멸자 생성이다."(들뢰즈, "문학과 삶", 『비평과 임상진단』, 1993, 프랑스어본 12쪽)

프랑스어 원본: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et, contrairement à un préjugé spiritualiste, c'est l'animal qui sait mourir et en a le sens ou le pressentiment. La littérature commence qvec la mort du porc-épic, suivant Lawrence, ou la mort de la taupe, suivant Kafka: "nos pauvres petites pattes rouges tendues in un geste de tendre pitié". On écrit pour les veaux qui meurent, disait Moritz. La langue se doit d'atteindre à des détours féminins, animaux, moléculaires, et tout détour est un devenir mortel." (Deleuze, "la littérature et la vie", Critique et Clinique, 1993, p. 12)

영어 번역본: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animal dies; and contrary to the spiritualist prejudice, it is the animal who knows how to die, who has a sense or premonition of death. Literature begins with a porcupine's death, according to Lawrence, or with the death of a mole, in Kafka: "our poor little red feet outstreched for tender sympathy." As Moritz said, one writes for dying calves." (Deleuze, "Literature and life,"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p. 2)

내가 아는 한 이와 유사한 구절은 적어도 세 곳에서 등장한다. 『천 개의 고원』(1980)의 10번째인 생성 고원,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1981),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 로런스, 카프카, 모리츠 등 인용된 작가도 비슷하지만(아마 호프만슈탈을 추가해도 좋겠다), 모두 '동물 생성' 또는 '필멸 생성'(='죽음 생성')과 관련해 언급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베이컨의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시체이다"라는 말을 들뢰즈는 중요하게 취급한다.

나는 2015년 인도 마니팔에서 국제들뢰즈학회아시아에서 이 구절들과 관련해 '에피쿠로스'(또는 '루크레티우스')적 해석을 제안했는데, 저명한 안 소바냐르그(Anne Sauvagnargues) 선생은 나의 해석에 웃으며 'absolutely not'이라며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갖진 못했지만(아쉽게도 내 발표가 마지막 날 마지막 세션이어서, 점심 먹고 곧 파했다), 그 후로 3년 넘게 더 생각해 봤지만, 나는 내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위의 내용과 연관된 에피쿠로스의 말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ho thanatos ouden pros hēmas). 왜냐하면 해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anaisthētei). 감각이 없는 것(to anaisthētoun)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주요 가르침』 II)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달려 있는데(en aisthēsei), 죽음은 감각의 상실(sterēsis aisthēseōs)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되면 필멸성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4)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나쁜 일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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