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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수기 공모전 참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도, 가장 슬픈 순간도 모두 아이들이 준다...

엄마, 아빠가 된다는 것, 정말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이지만 또한 가장 힘든 의무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첫째아이는 계획도 없이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와 가족이란 걸 만들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정말 표현대로 손가는 일 하나없이 얼마나 건강하고 착하고 우직하게 자라 주었는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에 비해 둘째는 철저히 계획적으로 가진 아이지요. 물론 삼신할매가 점지해주시지 않았다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넓은 이국 땅에 우리 부부 늙어서 저 세강 가고 나면 일가 친척 하나 없을 첫째를 위해 둘째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임신 후반에는 친정 부모님께서 오셔서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 주시고 우리 딸 힘들다 하시며 많이 보살펴 주셨습니다. 나이 서른 넘어도 자식은 평생 육아 대상인가 봅니다.
땡스기빙 이틀 전, 산부인과에서 걸려온 전화 메세지 하나. 기형아 검사에서 이상이 보이니 병원으로 연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낮에 저희 부부가 집에 없을 때 전화가 왔으니 부모님들은 영어라 안 받으셨고 저희는 메세지 확인을 늦게 한지라 병원에 연락도 못한 채 걱정 한가득 땡스기빙 연휴도 제대로 즐기기 못했네요.

연휴를 지내고 부랴부랴 간 병원에서는 다운 증후군이 의심된다면서 임산부의 나이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양수 검사를 받지 않겠냐 권유하더군요. 그때 가장 힘이 되어준건 당연히 아이 아빠였습니다. 남편이자 내편인 사람이지요. 우리 아이가 어떻게 생겼든 우리한테 온 아이니까 그냥 낳자고요.
그래도 막상 분만실에서 아이 낳을 때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를 보고 남편을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 바다 정상이야'
그 한마디에 아이가 정상인 안도감보다 이 사람은 그동안 한번도 나한테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혼자 얼마나 걱정했을까 싶은 마음에 울컥했습니다.

친정부모님께서는 바다가 세상에 나오는 것도 못보시고 한국에 가셔야 했고 시부모님께서 산후조리와 함께 6개월간 바다를 키워주시고 가셨습니다. 저는 약간의 출산 우울증이 있어 오히려 6주만에 일하러 밖으로 나갔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요.

엄마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항상 기도를 합니다.
건강하고 착하고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 자장가도 항상 이렇게 부르곤 했죠.

우리 하늘(바다)~ 잘도 잔다~
우리 하늘(바다)~ 건강한 하늘(바다)
우리 하늘(바다)~ 착한 하늘(바다)
우리 하늘(바다)~ 똑똑한 하늘(바다)
우리 하늘(바다)~ 멋진 하늘(바다)

젖먹다 말고 내게 눈을 맞추고 방긋 웃는 아이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는 이 세상에 정말 무방비 상태로 왔구나, 나만 믿고 왔구나. 내가 얼마나 막중한 청지기의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해 줄수 있는 건 몸과 정신의 건강 밖에는 없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부모님께서 한국으로 가신후, 바다가 6개월부터 아빠 엄마와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집니다.
하늘이는 엄마가 집에 올때쯤 아빠와 함께 밖에 나와 기다릴 때면 저~ 100미터 밖에서부터 알아보고 아빠 품에서 좋아 풀쩍풀쩍 뛰는데, 바다는 30센티 앞에 가서야 절 알아보고 웃는 겁니다.

정기 첵업 때 소아과에서도 눈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고 안과 스페셜리스트에게 보내더군요. 안과에서는 선천성 사시인 것 같다고 일단 한 눈씩 교대로 안대를 붙이고 있으라 하더군요. 6 개월 된 아이가 하루 종일 한 눈에 패치를 붙이고 있으려니 얼마나 갑갑했을 것이며 집에서 아이와 있는 아빠는 그걸 달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안경점에서 제일 작은 사이즈 테에 돋보기도 만들어 씌우기도 하고 그렇게 몇개월을 보내다가 결국은 마이애미에 있는 소아 안과 전문의에게 리퍼를 해주더군요, 수술이 필요한 것 같다고.

차로 3시간 거리의 마이애미 병원에 여러차례 다니며 모든 검사를 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해서 잡은 날이 돌 며칠 후였네요. 어른들께서는 그런 수술 앞두고 돌 잔치 하는 거 아니라고 하셔서 우리 바다는 돌 잔치, 돌 사진 그런 거 하나도 없네요. 그뿐아니라 사시가 심해서 옆을 볼때면 검은 눈동자가 거의 하나도 안보이고 흰자만 보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예쁜 시절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2006년 1월 임신 6개월, 이때부터 8개월까지 가장 잘 먹고 가장 몸무게가 많이 늘어나는 시기이지요. 저는 약국에서 그 놈의 역사적인 메디케어 D 플랜이 시작되는 바람에 폭주하는 업무량에 그 시기에 점심을 한번도 먹지 못했습니다. 몸무게도 하나도 안 늘었지요. 혹시 그 때문에 바다가 그렇게 된 건 아닐까 자책도 했었습니다.

새벽에 잡힌 수술 시간 때문에 전날 온가족이 마이애미 병원 근처 호텔에 자고 새벽 수술에 들어갑니다. 어른들의 사시 수술과는 달리 아이들은 전신마취를 해야합니다. 안 그래도 발달 상황표의 바닥에서 3% 였던 바다가 잠들어 수술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작더군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마취가 막 깬 아이를 간호사가 한 손에 안고 옵니다. 막말로 정말 작은 원숭이 새끼 같았습니다 ㅎㅎ 기저귀에 헐렁한 수술 가운 하나 걸치고 두 눈은 충혈되어 빨갛고... 그래도 엄마를 보고 씨익~ 웃어주는 우리 바다~

지금도 저는 누가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서슴없이 아침에 우리 바다 깨우러 가면 바다가 반쯤 뜬 눈으로 씨익~ 웃어줄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뒤로도 패치와 돋보기 안경을 사용하면서 한 두달에 한 번씩 경과를 관찰했지만 그리 나아지지 않아 양 눈의 다른 쪽 근육도 수술을 해야 한다해서 20개월쯤 두번째 수술을 받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를 닮아 참 순하고 참을성이 많습니다. 수술 후에 통증이 있을거라며 준 진통제도 전혀 찾지를 않습니다.
평소에 열나고 아파도 머리 만져서 알기 전까지 투정도 안부리는 미련 곰탱이들입니다.

두번째 수술 후부터 3개월마다 마이애미로 검진을 다녔습니다. 선천성 사시는 시력 발달이 안되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치면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매번 왕복 6시간의 거리를 온 가족이 왔다갔다하며 7년을 보냈습니다. 지루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만 7세가 되어 이제 또래 아이들과 같은 정상 시력이 되었다며 이젠 병원에 안 와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이제 됐구나' 하는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 옆에서 묵묵히 잘 자라준 하늘이에게 참 고맙습니다.
바다가 태어나면서부터 정말 바다를 사랑해주는 듬직하고 멋진 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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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평소에 가족, 친구 및 주위 사람들에게 제 애기, 특히 아쉬운 소리, 힘든 이야기 안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는 가족들도 자세히는 몰랐던 스토리를 여기에 풀어놓게 되네요...
P.S.2. 이틀전 [나의 남자] 아빠라는 이름의 남자라는 글을 올렸었습니다. 사실 우리집 아들들은 풀타임 대디인 남편이 다 키웠습니다. 위의 글이 오히려 공모전에 참가해야 할 것 같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