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며

image“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처음 읽은 게 언제쯤일까. 오랫만에 책장의 책을 빼 첫 장을 넘겨본다. 1993년 8월 9쇄로 발행된 책에서 나는 이 말을 처음 만났다. 이런 사랑과 앎의 교훈을 처음 건넨 이는 조선시대의 어느 문인이고, 유 교수는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의 질문을 듣고 고민하다 이 말이 정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답사기>의 서문에 소개하고 있다.

어리버리 4년차 승무원이던 내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 이 말을 제법 가슴 깊이 품었던가 보다. 내가 하는 일,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세상, 여행, 책, 영화, 음악 등등 그 모든 새로운 것을 만나거나 접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그 위력은 사뭇 놀라웠다.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일상도 사랑의 시선으로 쳐다보니 놀랍게도 새롭게 보였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분들을 만나는 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분들을 만나는 일. 나는 어쩌면 이런 내 일을 그때부터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끝난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은 영화 음향감독이었다. 그가 철부지 동생에게 음향일을 가르치는데, 감독입봉의 일념으로 형 몰래 시나리오를 쓰는 동생은 음향일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니 주인공이 시키는 일을 재대로 못 해내 계속 야단맞고 지적을 당한다. 밤의 소리가 다르고, 서해와 동해의 파도 소리가 다르며, 그냥 차는 깡통 소리와 화가 나서 차는 깡통 소리가 다르다며, 주인공은 동생을 가르친다. 어느 날 주인공은 동생에게 햇살 비치는 환한 창을 열 때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가 없다며 그 소리를 찾으라고 한다.

이후 동생은 어린 여자친구를 녹음실로 데려와 “음향”이 안들어간 창을 여는 영상과 음향이 들어간 영상을 보여준다. 햇살 비치는 소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드라마는 두 번의 영상을 보여준다. 한번을 창을 열 때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을 깔았고, 한번은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어갔다. 그 두 가지 확연히 다른 소리가 들어감으로써 그저 창을 여는 영상이 주는 이야기가 달라져버렸다.

우리는 일상을 어떻게 기억할까? 일상은 영화의 한 장면과 달리 시각의 홍수 속에서 부리나케 흘러간다.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일상의 시간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하는 건 그런 특별한 ‘소리’와 ‘결’이 아닐까?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과 질감 등 공감각으로 엮음으로써 우리는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기억 속으로 저장한다. 일을 하며 만나는 승객들에게 밝고 환하게 말하라고 수도 없이 교육받았다. 나 또한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같은 얘기를 늘 하지만,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건넨 환한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기억 속 영화의 ‘음향’이 되어 그 기억의 생생함을 배가시킨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의 여행은 어떤 소리로 시작될까? 여행용 신발이 내는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 그 뒤를 따르는 공항 바닥 위 짐가방 롤러 구르는 소리, 멀리서 메아리치는 탑승 안내 방송 소리. 그렇게 긴 탑승구를 지나 타고갈 비행기의 입구에서 승객들을 맞는 승무원들의 소리를 만난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파리까지 모시겠습니다.”
승객들의 부푼 마음처럼 에너지로 충만한 그 밝고 환한 인사의 목소리는 아침 햇살 비치는 큰 창을 열 때 들어오는 햇살 소리라고 해도 좋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멋진 음향효과라고 해도 좋다. 수백 명의 승객들이 내 목소리를 배경 삼아 멋진 여행의 출발을 기억할 것이라 생각하니, 인사를 건네는 내 마음도 더 큰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걸 이제 나는 날마다 느낀다.

조선과 오늘을 이어준 유흥준 교수의 그 글 한 줄과 드라마에서 알게 된 “소리 없던 것들에 입혀진 소리”. 이처럼 내가 만나는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살아 있는 현실로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를 하나씩 깨닫는 일은 늘 놀라운 경험이다. 더구나 그것이 내 일터에서 고객으로 만나는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소중하다. 깨달음 이후 보이는 것은 정말 예전같지 않다. 이토록 소중하고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충만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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